“하군 해녀 몫 남기려고 상군 해녀는 얕은 곳 물질 삼갔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부산숨비] ② 해녀의 삶

“‘해녀도 사람이네!’ 이런 말 들으면서 우린 살았다고.”

지난달 2일 영도구 해녀문화전시관에서 처음 만난 동삼어촌계 고복화(86) 해녀가 대화 도중 털어놓은 말이다. 젊은 시절 동삼동 바닷가에서 추위에 떨며 앉아 있는데 지나가던 순경이 해녀들에게 던진 말이라고 회상했다.

추위보다 비수 같은 말이 날아와도 부산 해녀들은 물질을 멈추지 않았다. 낮잡아보고 업신여겨도 먹고살려고 바다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는 “부모 집보다 낫지. 바다에 가면 돈이 생기잖아. 어머니에겐 돈 달라 못 해도 바당(‘바다’의 제주 말)에 가면 돈이 나오거든”이라 했다.

고무잠수복 보급 전엔 속곳 차림
곱지 않은 시선에도 바닷속으로
잠수 실력 따라 공장보다 더 벌어
만삭의 몸에도 자식 먹이려 물질



■ 추운 바다를 견딘 이유

해녀들은 억척스럽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해녀들을 만나 “물질은 언제 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날만 좋으면 간다”는 답이 돌아왔다. 차가운 바다도 마다하지 않았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다. 수영구 남천어촌계 강순희(75) 해녀는 “제주도에서 부산에 온 남편들은 그럴듯한 직장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며 “삼남매 교육비랑 병원비를 마련하려면 남편이 버는 돈으로 어림도 없었다”고 했다.

물질은 돈이 됐다. 시대마다 달라도 상대적으로 벌이가 크게 나을 때도 있었다. 영도구 동삼어촌계 해녀인 이정옥(67) 부녀회장은 “1979년쯤 대동 양말공장에 다녀봤는데 당시 일당 200원을 준다고 했다”며 “물질은 잘하면 하루에 1500원을 버니 수입이 훨씬 좋았다”고 증언했다.

해녀들은 웬만해선 물질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나날이 이어지자 여러 어촌계에서 해녀들끼리 쉬는 날을 정하기도 했다. 영도구 동삼어촌계는 ‘사리’ 전후로 총 3일간 물질을 하지 않는다. 사리는 만조와 간조 수위 차이가 가장 커 물이 세게 흐르는 시기다.



■ 실력이 좌우한 수입

해녀들은 실력에 따라 수입도 천차만별이었다. 바다에서 건지는 양만큼 돈을 벌었다. 해녀들은 보통 물질 능력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뉜다.

기준점이 다른 경우가 있어도 보통 상군은 10~20m, 중군은 7~8m, 하군은 3~5m까지 잠수하는 해녀를 뜻한다. 상군 해녀는 2분 이상도 잠수가 가능한 경우도 있다. 대상군은 상군 중에서도 최상급 실력을 갖춘 해녀를 말한다.

우스갯소리로 ‘똥군’이라 불리는 해녀도 있다. 똥군은 이제 막 물질을 배우거나 깊게 잠수를 못 하는 해녀에게 쓰는 말이다. 동의대 유형숙 한일해녀연구소장은 “잠수 깊이나 숨을 참는 시간이 상군부터 하군까지 분류하는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다”며 “물 흐름을 파악하고 물질할 방향을 결정하는 능력 등도 고려된다”고 밝혔다.

더욱 깊은 곳에서 오래 물질을 할 수 있다면 그만큼 더 많은 해산물을 잡는 건 당연한 결과다. 특히 날씨가 따뜻해지면 해삼, 전복 등은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간다. 상군인 이정옥 부녀회장은 “15m 정도 되는 바다에 가면 큰 해삼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자연스레 중군과 하군은 수입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서구 암남어촌계 임원순(88) 해녀는 “상군인 해녀가 많았는데 난 물질도 늦게 배운 데다 귀가 아파서 깊게 못 들어갔다”며 “중군쯤 됐는데 10m 이상 들어가는 해녀들에 비해 많이 못 건졌다”고 말했다. 이에 상군들은 중·하군 해녀들을 위해 얕은 곳에 있는 것은 웬만하면 잡지 않았다.



■거지라 불린 해녀들

1880년대부터 부산에 정착한 해녀를 향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해녀를 뜻하는 ‘나잠어업인’을 그대로 풀면 나체로 잠수해 해산물을 잡는 사람을 뜻한다. 고무 잠수복이 보급되기 전 해녀들은 얇은 ‘물소중이’나 ‘속곳’만 입고 일했는데, 세상은 그들을 무시하는 눈초리로 보기 일쑤였다. 한밤중 제주도에서 출향한 해녀 집에 찾아가 문고리를 잡아당기기도 했다. 젖은 옷을 들고 불턱에서 몸을 녹이고 있으면 힐끗거리는 사람도 많았다.

남천어촌계 노봉금(76) 해녀는 “옛날에는 해녀들을 사람으로 상대도 안 했지. 물소중이 같은 옷을 입고 살을 이만큼 다 내놓고 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가 불턱에서 불을 쬐고 있으면 ‘걸베이(거지)’냐고 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곱지 않은 시선에도 해녀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물질을 반복했다. 동생들 공부시키려고, 자식들 뭐라도 하나 더 먹이기 위해 바다에 몸을 맡겼다. 만삭의 몸으로 물질하기도 했다. 사하구 다대어촌계 윤복득(71) 부녀회장은 “큰아들이 10월 10일에 태어났는데 9월 말까지 물질을 나갔다”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해녀들 모두 다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했다.

장병진·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