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빈곤·분노… 일 '도리마 범죄(이상동기 범죄)' 빼닮았다

나웅기 기자 wongg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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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도쿄 ‘아키하바라 사건’
트럭 몰고 흉기 난동 7명 사망
2019·2021년에도 유사 범행
일, 사회문제 부각 후 대책 연구

위험 대상 파악 후 맞춤 치료 등
우리 사회도 근본 대응 필요 주문

2008년 일본 도쿄 아카하바라 전철역에서 벌어진 무차별 칼부림 사건 현장에 출동한 구조대원들(왼쪽)과 트럭으로 돌진한 데 이어 무차별 칼부림으로 19명의 사상자를 내고 현장에서 경찰에 연행되고 있는 범인. AP연합뉴스 2008년 일본 도쿄 아카하바라 전철역에서 벌어진 무차별 칼부림 사건 현장에 출동한 구조대원들(왼쪽)과 트럭으로 돌진한 데 이어 무차별 칼부림으로 19명의 사상자를 내고 현장에서 경찰에 연행되고 있는 범인. AP연합뉴스

최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벌어진 ‘묻지마 흉기 난동’ 사건은 일본이 겪었던 범죄 양상과 닮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은 묻지마 흉기 난동 범죄를 연구하며 관련 대책 마련에 나섰는데, 우리나라도 유사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처벌 강화 이외에도 사회 전반적인 연구와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신림역 흉기 난동’ ‘분당 차량 돌진 및 흉기 난동’ 등 묻지마 범죄는 일본에서 이미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된 지 오래다. 일본에서는 묻지마 흉기 난동 사건(이상동기 범죄)을 ‘도리마 범죄’라고 하는데, 이는 길거리의 악마라는 뜻으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명확한 동기 없이 해를 가하는 사건을 의미한다.

15년 전 7명을 숨지게 한 ‘아키하바라 무차별 살인 사건’이 대표적이다. 2008년 6월 도쿄의 한 교차로에서 20대 남성이 2t짜리 트럭을 몰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행인에게 돌진했다. 이 남성은 시민 5명을 트럭으로 들이받은 뒤 행인과 경찰을 포함한 14명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이 흉기 난동으로 7명이 숨졌다. 당시 범인은 ‘승자는 모두 죽이겠다’며 특별한 동기 없이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전해졌다.

아키하바라 사건 이후에도 일본에서 도리마 범죄는 끊이지 않았다. 2019년 도쿄에서는 50대 남성이 통학 버스를 기다리는 어린이들에게 흉기를 휘두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초등학생 등 2명이 숨지고, 17명이 다쳤다. 2021년 8월 도쿄 지하철 내 칼부림 사건 등 장소만 달라지고 범죄는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묻지마 흉기 난동 범죄가 사회 문제로 부각되자 관련 연구에 나섰다. 일본은 묻지마 흉기 난동 범죄 원인 중 하나로 사회·경제적 고립과 장기 경기 침체로 인한 구조적인 문제 등을 꼽았다. 1990년대 일본은 버블 붕괴 여파와 양극화 등 장기 불황이 지속됐고, 고립청년 문제도 심각해졌다. 일본 법무성 조사에 따르면 묻지마 흉기 난동 가해자들은 대부분 20~40대 사이의 저학력 남성으로 범행 당시 특정한 직업이 없거나 가족이나 친구 등 유대 관계가 없던 경우가 많았다.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경제적으로 빈곤한 상태에 이르자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고, 공격성을 사회로 표출한 사례다.

경기도 성남시 서현역 한 대형 백화점 인근에 마련된 분당 흉기 관련 피해자 추모 공간을 찾은 시민. 연합뉴스 경기도 성남시 서현역 한 대형 백화점 인근에 마련된 분당 흉기 관련 피해자 추모 공간을 찾은 시민. 연합뉴스

최근 한국도 일본과 비슷한 모습이다. 경기 침체로 취업을 포기하거나 사회적으로 고립된 청년도 늘어났다. 사회적 불만이 누적되면 불만의 원인이 되는 상대를 찾는 경향이 있고, 다른 집단을 화풀이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경우도 생긴다. 신림동 흉기 난동 사건 피의자 조선(33)은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어 범행을 저질렀다’는 취지로 경찰에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일 14명의 사상자를 낸 ‘분당 흉기 난동 사건’ 피의자 최원종. 연합뉴스 지난 3일 14명의 사상자를 낸 ‘분당 흉기 난동 사건’ 피의자 최원종. 연합뉴스

이 같은 유사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치안 강화 외에도 사회적 고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대책 수립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묻지마 흉기 난동은 ‘자포자기형’ 범죄로, 검거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특정 다수를 향한 원한 분출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누구나 공격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면 상대에 대한 신뢰는 떨어지고 사회 혼란이 올 수 있다.

동국대 경찰사법대 곽대경 교수는 “최근 벌어진 일련의 무차별 범죄는 가해자가 사회와 연결된 유대의 끈이 끊어졌다고 생각해 고립감을 느끼고 ‘자포자기’ 상태로 극단적인 행동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며 “지자체 차원에서 위험 단계에 있는 사람들을 빠르게 파악해 맞춤형 치료나 상담에 나서는 등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웅기 기자 wonggy@busan.com


나웅기 기자 wongg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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