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매장지 아는 90대 주민 있다 [8000 원혼 우키시마호 비극 ②]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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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늦기 전에 유해 발굴 나서야
유텐지 유해 280구 봉환 가능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해 280구가 안치된 도쿄 유텐지. 마이즈루모임 제공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해 280구가 안치된 도쿄 유텐지. 마이즈루모임 제공
부산일보 | 1945년 8월 24일. 해방의 기쁨도 잠시, 강제동원 한국인을 태운 귀국선 ‘우키시마호’가 일본 마이즈루항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4730t급 거함은 돌연 뱃머리를 돌려 그곳으로 향했고, 의문의 폭발과 함께 사라졌다.

1945년 8월 24일. 해방의 기쁨도 잠시, 강제동원 한국인을 태운 귀국선 ‘우키시마호’가 일본 마이즈루항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4730t급 거함은 돌연 뱃머리를 돌려 그곳으로 향했고, 의문의 폭발과 함께 사라졌다.

그토록 그리던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수천 명의 한국인이 수장됐다. 일본이 발표한 한국인 공식 사망자는 524명. <부산일보>와 <서일본신문>은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및 옛 오미나토 해군시설부의 우키시마호 희생자 명단을 각각 단독 입수해 번역했다.

2023년 8월 8일. 78년이 흘렀지만 그들은 죽어서도 고향을 찾지 못한다. 배는 고철로 팔렸고, 대부분의 유해는 주변에 집단 매장되거나 바닷속에 잠겼다. 50년 전 각계의 노력 끝에 국내로 반환된 유골조차 뿔뿔이 흩어졌다.

<부산일보>는 자매지 <서일본신문>과 한일 지역언론사 최초의 공동기획으로 일본에 남은 유골을 되찾고 ‘잊힐 위기’에 놓인 우키시마호의 마지막 기록을 남긴다. 이미 봉환된 유골도 한데 모아 ‘그날’을 기억할 역사적 공간이 마련되길 바란다. 현 정부의 미래 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풀어야 할 실타래다. 목적지 부산항을 향한 우키시마호의 마지막 항해다.

“제 나이 여든한 살입니다. 죽어서 아버지를 뵈면 적어도 ‘유골은 고국의 금수강산에 모셔뒀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유족 한영용 씨)


일본 마이즈루만 일대에 묻힌 우키시마호 사건 희생자 유해는 대내외 환경을 볼 때 발굴 가능성이 높다. 다만 오랜 시간이 지난 만큼 하루빨리 매장지를 기억하는 현지 주민이나 전문가 증언을 확보해야 한다. 도쿄 유텐지에 보관된 유해 봉환과 함께 현장 조사가 진행될 경우, 78년 만에 우키시마호 사건이 대대적인 수습 절차에 들어가게 된다.

한일문화연구소 김문길 소장은 “침몰지 수중에 들어갔던 스쿠버에 확인한 결과, 해당 지점은 조류가 안쪽으로 흘러 퇴적층이 쌓이는 곳”이라면서 “비용과 시간을 들인다면 충분히 유해 발굴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전문가와 유족회 등에 따르면 육지의 집단 매장지 중에서도 도로와 큰 건물이 들어선 곳을 제외하고 조사 가능한 곳들이 꽤 있다. 마이즈루 대교와 1km 떨어진 해안가, 마이즈루교육대 인근 등이다. 구체적인 지점을 목격했다는 90대 현지 주민도 있다.

현재 가장 빠르게 수습이 가능한 유해는 도쿄 유텐지에 보관된 280구다. 정부는 2008~2010년에 이 유해의 국내 반환을 추진했다. 당시 조선인 군인, 군무원 유해 423구를 봉환하면서 우키시마호 희생자도 포함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유족의 요구 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봉환은 무산됐다. 유족은 철저한 우키시마호 진상 규명과 희생자에 대한 일본의 예우 등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행정안전부는 유족의 의사만 다시 모인다면 유해 봉환을 재추진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현재 일본 측에 유텐지에 보관 중인 희생자 유해의 개별 명단을 요청한 상태다. 최근 80대 이상 고령에 접어든 유족들이 유골 봉환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쳐, 유텐지 유골 봉환이 성사될 여지가 적지 않다.

지난 7일 행정안전부 강제동원희생자유해봉환과 관계자는 “유텐지 유골이 잘 봉환될 수 있도록 일본과 협의할 예정이며, 유족분들의 의사를 파악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유텐지 명단이 확보되면 과거 국내로 반환됐던 유해 행방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할 전망이다. 전체 사망자 명단에서 유텐지에 남은 명단을 제외하면 기봉환자를 추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1971~1976년 3차례에 걸쳐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골 241구를 봉환했지만, 이후 추적 조사를 하지 않아 유골의 행방을 놓친 상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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