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아버지보다 내 나이 더 들도록 아버진 여전히 바닷속에…"[8000 원혼 우키시마호 비극 ②]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 , 손희문 기자 moonsla@busan.com , 김보경 PD harufo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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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 원혼 우키시마호 비극 ②] 78년 사무친 유족의 한

침몰 현장 찾고 정부에 따져도
손에 쥔 것 없이 유족도 늙어가
계 모임하던 생존자들 이젠 없고
평생 가족 찾다 한 맺힌 사별도
기억 있을 때 추모공간 마련을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족 한영용 씨가 경남 거창군 자택에서 일본으로 강제징용 되기 전 아버지가 직접 쓴 시집을 살펴보고 있다. 유일하게 남은 아버지 유품이다. 김보경 PD harufor@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족 한영용 씨가 경남 거창군 자택에서 일본으로 강제징용 되기 전 아버지가 직접 쓴 시집을 살펴보고 있다. 유일하게 남은 아버지 유품이다. 김보경 PD harufor@
부산일보 | 1945년 8월 24일. 해방의 기쁨도 잠시, 강제동원 한국인을 태운 귀국선 ‘우키시마호’가 일본 마이즈루항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4730t급 거함은 돌연 뱃머리를 돌려 그곳으로 향했고, 의문의 폭발과 함께 사라졌다.


해방 직후, 강제동원 한국인을 태운 귀국선 ‘우키시마호’가 일본 마이즈루항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4730t급 거함은 돌연 뱃머리를 돌려 그곳으로 향했고, 의문의 폭발과 함께 사라졌다.

그토록 그리던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수천 명의 한국인이 수장됐다. 일본이 발표한 한국인 공식 사망자는 524명. <부산일보>와 <서일본신문>은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및 옛 오미나토 해군시설부의 우키시마호 희생자 명단을 각각 단독 입수해 번역했다. 1950년 일본 외무성 기록문서인 ‘우키시마호 인양요청서’에 따르면 배 탑승 인원은 8000여 명이었다.

2023년 8월 8일. 78년이 흘렀지만 그들은 죽어서도 고향을 찾지 못한다. 배는 고철로 팔렸고, 대부분의 유해는 주변에 집단 매장되거나 바닷속에 잠겼다. 50년 전 각계의 노력 끝에 국내로 반환된 유골조차 뿔뿔이 흩어졌다.

<부산일보>는 자매지 <서일본신문>과 한일 지역언론사 최초의 공동기획으로 일본에 남은 유골을 되찾고 ‘잊힐 위기’에 놓인 우키시마호의 마지막 기록을 남긴다. 이미 봉환된 유골도 한데 모아 ‘그날’을 기억할 역사적 공간이 마련되길 바란다. 현 정부의 미래 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풀어야 할 실타래다. 목적지 부산항을 향한 우키시마호의 마지막 항해다.


1945년 8월 24일. 귀향의 꿈에 부풀어 부산행 우키시마호를 탄 한국인 8000여 명이 마이즈루 앞바다에 수장됐다. 그날 이후 78년이 지났다. 고향 땅에 돌아오려다 물에 잠긴 이들을 세상이 잊어가는 사이, 생존자들은 그날을 잊은 적이 없다.

특히 그날의 기억은 다음 세대인 유족에게 건너갔다. 희생자·생존자 유족들은 일본의 고의 폭침을 규명하기 위해 일본과 한국을 바쁘게 오갔다. 침몰 현장도 수차례 찾았다. 법원과 정부에 따져 묻고, 서명운동으로 그날을 시민들에게 남기려고 애썼다. 그러나 손에 쥔 것은 없었다.

이제 남은 이들은 조급해 한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몸은 불편한데, 아버지(유해)가 돌아오기만을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어요. 한시가 급합니다.”(우키시마호 사건 희생자 김홍태 씨 아들 김영채 씨)

이들의 바람은 다만, 물속에 잠겨있는 희생자들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 오는 것. 차가운 바다에서 ‘이름 석 자’라도 건져내고 싶다. 이제 그날을 기억하는 생존자는 대부분 세상을 등졌고 그날이 한스러운 유족들조차 늙고 있다. 막다른 길에 선 생존자·희생자 유족들을 만났다.


가족 유해를 찾기 위해 평생 애썼던 우키시마호 생존자이자 유족인 장영도 씨 사진. 김보경 PD harufor@ 가족 유해를 찾기 위해 평생 애썼던 우키시마호 생존자이자 유족인 장영도 씨 사진. 김보경 PD harufor@

■“20년 넘게 고함쳤지만 모두가 외면”

한영용(81) 씨는 우키시마호 사건 희생자 한석희 씨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집을 떠났을 때 한 씨의 나이는 세 살. 아버지에 대한 어떠한 기억도 한 씨에게 없다. 공식 사망자 명부에도 아버지 이름은 올라가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일본에 끌려갔다 살아 돌아온 동네 어른 유경수 씨의 이야기, 강제징용 되기 전 쓰신 시집이 유일하게 남은 아버지의 흔적이다.

침몰 당시, 유 씨는 “빨리 갑판 위로 올라와”라며 한 씨에게 소리 쳤다. 한 씨는 배가 무너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가방은 어떻게 할까.” 가방에는 지금껏 일본에서 일하며 번 몇 푼의 돈이 들어 있었다.

오매불망 아버지를 기다리던 가족들은 사망 소식을 듣고 뒤늦게 빈소를 차렸다. 한 씨는 “빈소를 차리던 날 할아버지가 나무 판 돈으로 술을 진득하게 잡수시고 거창군수한테 가서 ‘내 자식 내놔라’ 고함을 질러 난리가 났었다”고 말했다.

한 씨는 20여 년째 우키시마호 유족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일본 국회의장을 만나고 우키시마호 재판이라면 전부 참석했다. 국가에서 추적하지 않던 우키시마호 유족과 생존자를 직접 찾기 위해 애썼던 것도 그다.

“정부가 해준 게 없거든. 20년 넘게 이렇게 고함을 치고 화를 내도 정부가 바다 속에 묻혀있는 유해를 찾아주려고 애쓴 적이 없어. 헌법에 분명히 있지 않나.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어디서 어떻게 있든 법률상 보호를 받는다고. 우리 아버지는 보호받은 게 뭐가 있나.”

한 씨의 마음은 조급하다. 갓난아기였던 한 씨가 잃은 아버지는 한 씨가 81세 노인이 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죽을 날이 코앞인데 아버지한테 가서 유해는 고국에다 모셔놨습니다, 그 소리는 할 수 있어야 할 거 아냐. 내 노력은 했습니다, 그게 아니라 아버지 유해는 내가 그래도 우리나라 금수강산에 모셔놨습니다, 그 소리를 할 수 있어야지.”


■“더는 앉아서 기다릴 수만 없다”

김영채(79) 씨도 우키시마호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 김홍태 씨는 우키시마호 희생자다.

아버지가 집을 떠날 당시 김 씨는 갓 태어났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30여 년이 지나서야 아버지 제삿날을 알았다. 일본에서 일하고 있는 줄만 알고 가족들은 아버지를 내내 기다렸다. 어느 날 귀국선이 침몰했다고는 들었으나 그 배에 아버지가 타고 있다고 누구도 김 씨 가족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기에 사고를 당했겠거니 싶어, 일본으로 끌려간 5월 24일을 아버지 제삿날로 삼아 30년간 제사를 지내왔다. 30년 후 아버지 강제징용 사실을 입증하다가 국가기록원에서 아버지가 귀국선에서 유명을 달리했다는 걸 확인했다.

김 씨는 뒤늦게 30년 전 아버지가 사라진 그날을 추적했다. 일본 외무성을 찾았다. 보건복지부도 찾았다. 폭침 사고 현장인 일본 교토 마이즈루항도 찾아갔다. 진상규명, 유해봉환, 공식 사과. 그 어느 것도 진전되는 것은 없었다. “희생자 유해가 도쿄 사찰 유텐지에 모셔졌다고 해 그곳을 찾았지만 아버지 성함도 위패도 없었습니다. 자식인데도 (내부로)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내가 당시 아버지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도록, 아버지는 여전히 차가운 바닷물 속에 잠겨있습니다. 더는 아버지가 돌아오기만을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어요.”

 

■“평생을 가족 유해 찾는 데 보냈다”

우키시마호 생존자 장영도(90) 씨는 올해 1월 세상을 떠났다. 장 씨는 가족들과 함께 우키시마호에 탑승했다가 어머니, 누나, 여동생을 잃었다. 희생자 유족인 장 씨의 아내 한귀분(86) 씨는 그의 생애를 가족을 찾기 위한 여정으로 기억했다.

“남편은 평생 그날을 마음에 두었어요.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의 유해를 찾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마이즈루만 동상을 찾아가 자갈밭에 누워 잠을 자기도 했어요. 우키시마호 사건에 대한 책과 자료들이 집에 수북해요. 그렇게 수십 년 유해 봉환을 위해 애썼는데 손에 잡히는 게 없었던 겁니다. 죽기 2년 전 어느 날에 체념하면서 ‘이제 그만 손 떼겠다’ 말했던 게 생생해요. 죽을 때까지 남편에겐 어찌 한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살아 돌아온 미안함 나눴던 아버지”

우키시마호 생존자 윤화수 씨의 아들 윤상호(64) 씨는 아버지가 우키시마호 생존자끼리 했던 계 모임을 기억했다.

“일본에 징용을 갔다온 사람들끼리 시골에서 계를 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1년에 한 번, 10월 말 추수를 끝내고 옷도 제일 좋은 걸로 입고서 서로 한 집씩 돌아가면서 했죠. 글을 못 배웠던 양반들이라 그때 기록이나 정리된 것도 없어요. 그냥 지금 생각하면 살아온 사람들끼리 미안함을 나눴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같이 끌려갔는데 같이 못 돌아온 그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강제징용 당시 아버지 고향 마을 청년들은 한꺼번에 끌려갔다. 우르르 멋모르고 갔다가 살아 돌아오거나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아버지는 세상을 떴고, 이제야 윤 씨는 아버지가 생존자들과 함께했던 시골 곗날을 떠올린다.

“누구 잘못으로 강제징용 됐고, 배가 침몰했는지 등 진상 규명은 자꾸 늦춰지지만, 최소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남았으면 좋겠어요. 아버지가 가고 나니 한번 제대로 물어라도 볼 걸 싶더라고요. 기록이라도 남겨야 후대가 이런 역사의 한 페이지가 있었다고 기억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계 모임에 나오던 사람들도 세상에 없다. 윤 씨는 이제야 기록과 기억의 의미를 되새겼다. “늦었지만 저처럼 아직 후손들의 기억에 그 사건이 남아있을 때 유해도 찾고 추모공간이라도 만드는 것, 그래서 제 후손에게 추모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아니겠습니까.”

서울·인천·광주·거창=변은샘·이승훈·손희문 기자 iamsa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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