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광복절과 ‘신 냉전’

송지연 기자 sj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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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연 정치·사회 파트장

일제 강점기 암흑기에서 빛을 회복한 광복절
냉전 체제 하에 분단과 6·25 전쟁 시발점 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신 냉전' 도래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험 역사 교훈 되새겨야

“우리가 총을 겨누며 들이닥치자 부엌을 뒤지던 인민군이 뒤를 돌아보는데,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어린 아이였어. 배가 많이 고팠겠지. 아이라도 총을 갖고 있으니 총을 들이댈 수밖에 없었어.”

평소 거의 말씀이 없으셨던 외조부께서 그날은 약주를 드시고 전쟁의 기억 한 자락을 들려주셨다. 경상도의 어느 시골에서 농사짓던 외조부는 6·25 전쟁 때 군인으로 참전하셨다.

무쇠처럼 단단했던 외조부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던 것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같이 행군하며 고향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가 폭격으로 갑자기 목숨을 잃었다거나 인민군 시체들을 무슨 물건처럼 구덩이에 묻은 경험을 들려주실 때는 긴 침묵이 함께 했다. 외조부의 침묵은 고통을 견디는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나중에 생각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외조부를 전쟁터에 보낸 외조모의 이야기도 믿기 힘들었다. 이장이 동네 공터에 마을의 성인 남자들은 다 모이라고 한 후 트럭을 타고 다 같이 이동했는데, 그것이 징집의 시작이었다. 트럭에 올라탄 외조부를 발견하고는 ‘어딜 가냐, 언제 오냐’고 물었더니 ‘오래 안 걸린다’는 답을 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1년이 넘도록 외조부와 마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쟁이 끝날 무렵 손가락이 잘리고 다리를 다친 외조부가 돌아왔을 때 놀라기도 했는데, 그나마 살아 돌아왔으니 다행으로 여겼다고.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했는데 외조부는 포탄 파편을 맞아 후방으로 이송 되면서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였다.

두 분의 전쟁 경험담을 떠올릴 때마다 평범한 촌부가 어린 아이에게 총을 겨누게 되고, 수없는 이들의 처참한 죽음을 시도 때도 없이 떠올리고, 마을에서 혼자 살아왔다는 미안함을 평생 안고 살게 되는 것이 전쟁이라는 사실이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6·25 전쟁 발발 5년 전 우리 민족이 맞이한 광복이라는 사건은 일제 암흑기를 벗어나, 말 그대로 ‘빛을 회복’한 거대한 희망의 이벤트였다. 하지만 냉전이라는 국제 질서 속에 광복은 분단과 전쟁의 시발점이었다.

많은 이들이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하고도 그 기회를 살리기는커녕 한반도 최대 비극인 6·25 전쟁으로 치닫게 됐는지, 학교에서 광복과 이후 시대를 배울 때 굉장히 의아했고 화가 치밀기까지 했다. 치열했던 항일의 역사와 외조부모를 비롯해 전쟁과 전후 많은 이들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광복 이후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이 성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라고 자문을 하기도 했다. 좌측 여운형과 우측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이 만약 성공했다면? 냉전의 극한 대립 속에서도 중립국 지위를 갖고 번영했던 유럽의 몇몇 나라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선명성이 부족한 이들은 세력을 모으기 힘든 것인지, 양극단에 서 있던 이들이 정국의 중심축이 됐고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좌우합작운동은 흐지부지됐다. 강대국 사이에 끼인 무정부 상태의 힘없는 나라를 기다린 것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신 냉전’이라 불리는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올해 광복절을 맞는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탈 냉전 시대를 맞은 지 불과 30년이 조금 지난 시점에 다시 우리는 냉전을 이야기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냉전은 열전의 형태로도 비화했다. 세계가 협력하며 자유롭게 오가고 무역하던 시대에서, 강대국을 중심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는 분위기가 강화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금융위기 이후 불완전함을 노출한 신자유주의 체제가 자국 중심 체제로 재편되는 움직임을 가속화 시켰다.

탈냉전 시대의 번영을 이끌던 미국과 영국은 각각 트럼프의 당선과 브렉시트 이후 세계와 맞잡은 손을 놓아버리고 자국 중심주의를 공언하고, 러시아와 중국은 민족주의에 기반한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 와중에 우리나라는 미국의 동맹 중심 정책에 적극 호응하며 신 냉전의 최전선에 서 있다.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는 열강의 각축장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국가가 엄청난 불행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우리는 안다.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죽이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광복 후 극심한 분열과 전쟁을 겪은 우리 민족은 처절하게 경험했다. 그 경험이 신 냉전 시대를 넘는 지혜로 확장되길 광복절을 맞아 다시 한번 간절하게 바란다.


송지연 기자 sj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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