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역사의 기억과 문화예술의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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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아시아 오케스트라 위크 2008’ 포스터. 남영희 제공 ‘아시아 오케스트라 위크 2008’ 포스터. 남영희 제공

1980년대 일본 잡지는 세련된 느낌이었다. 특히 패션잡지 ‘논노’가 인기였다. 남포동과 중앙동 잡화점에서 살 수 있었다. 일본어를 몰라도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 화장품 화보는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음반이나 카세트테이프, 로맨스소설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일본 대중문화가 암암리에 유통되고 있었어도 어쩐지 떳떳하지 못했다. 일본문화를 왜색이라 부르던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민족주의적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했던 까닭이었을까.

대중문화의 전면 개방까지 나아가지 못했어도, 1990년대는 드물지 않게 한일 간 문화예술 교류의 물꼬가 트이던 시기였다. 1990년 후쿠오카시는 9월을 ‘아시아의 달’로 지정하고 문화예술 행사를 열었다. 오프닝 행사 ‘아시안 프렌들리 콘서트’에는 규슈심포니와 동아시아 여러 교향악단이 참가했다. 부산시향은 매년 초청을 받았다. 당시 규슈심포니 매니저 가즈토시 구보타와 부산시향 기획실장 박원철은 형제처럼 각별한 사이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단원들의 우정도 깊어갔다.

진영논리에 기댄 역사 인식을 떠나 이들과의 친교를 생각한다. 규슈심포니 구보타는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인절미 과자를 한아름 사다 주던 살뜰한 다니구치, 깐깐한 이마무라와 친절한 히키치도 잊을 수 없다. 아크로스 후쿠오카의 유능한 기획자 가토, 2008년 아시아 오케스트라 위크에 부산시향을 초청한 듀오 재팬사의 나카츠카와, 유럽 음악계와 연결해준 아스펜사의 이토.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그리운 삶의 풍경이자 역사다.

아시아 프렌들리 콘서트는 2009년까지 지속하다가 중단되고 말았다. 후쿠오카시 재정 지원이 끊긴 이후, 규슈심포니가 어렵사리 꾸려오던 행사가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오랜 교분을 저버릴 수 없어 2010년 부산시향 정기연주회에 규슈심포니 단원을 초청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국경을 넘어 서로의 소리를 보듬으며 하모니를 일구던 문화예술 교류는 뜻깊었다. 국가 간 파트너십 구축이라든가 식민지배의 통절한 반성을 촉구하는 거대담론은 아닐지라도 새로운 관계를 여는 마중물이었다.

이즈음 현실정치가 역사적 상상력을 무디게 하고 갈등의 제방을 더 높이 쌓고 있다. 식민지배라는 통한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차가운 북만주와 러시아의 형옥에서 순사한 선열들의 형형한 눈빛과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던 독립항쟁의 날들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하물며 이를 잊은 ‘프렌들리’가 어찌 있을 수 있으랴. 그렇다 하더라도 한 국가의 미래를 굴곡 많은 역사의 자장 안에 가둘 수는 없다. 예술적 상상력과 국경을 넘나들던 선율이 역사의 황혼으로 치닫지 않았던 그날들이 그립다. 문화예술 교류는 과거를 딛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희망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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