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도대체 안전한 곳은 어디인가

이자영 기자 2young@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이자영 기획취재부 차장

이상 동기·강력 범죄 잇따라 불안감
기후 위기 속 전 세계가 재해 ‘몸살’
‘무대책 행정’ 불신에 각자도생 급급
위험 대비 사회적 시스템 구축 시급

“폭염 때문에 해수욕장도 못 갔는데, 내일은 흉기 난동 예고 글 때문에 서면도 못 갈 것 같고….” 이달 초 부산으로 휴가를 온 지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난 3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 흉기 난동 사건 이후 전국 주요 지하철역에 대한 살인 예고 글이 잇따르던 때였다. 지인이 걱정돼 다음 날 다시 안부를 물었다. 결국 서면을 찾았다는 그는 뜻밖에도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여기가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것 같아. 경찰이 쫙 깔려서 걱정 없겠는데.” 경찰 인력이 대거 투입된 덕분에 가장 위험할 줄 알았던 지역이 그 순간 가장 안전한 곳으로 느껴지게 된 상황이 아이러니했다.

지난달 21일 서울 관악구 신림역 인근에서 발생한 흉기 난동 사건 후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이상 동기 범죄’(일명 ‘묻지마 범죄’)에 대한 우려가 높다. 대낮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충격은 더 컸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고 해서 더 이상 안심할 수 없게 됐다. 2주도 채 안 돼 발생한 서현역 사건 역시 퇴근 시간대 인파가 몰리는 백화점 안팎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다.

범죄로부터 안전한 곳은 없는 걸까. 세계가 부러워하는 ‘치안 강국’은 허상이었을까. 영국 BBC 방송은 지난 13일(현지시간) 최근 우리나라에서 잇따르고 있는 ‘묻지마 범죄’를 알파벳 ‘Mudjima’로 그대로 표기해 보도했다. 다만, BBC는 ‘한국은 여전히 매우 안전한 나라’라는 전문가의 말도 전했다. 우리나라의 살인율은 인구 10만 명당 1.3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절반 수준이고, 미국의 5분의 1도 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뒤이어 서울 신림동에선 또 한 건의 흉악 범죄가 발생했다. 지난 17일 30대 남성이 한 공원 둘레길에서 여성을 둔기로 폭행한 뒤 성폭행했고, 의식 불명이던 피해자는 지난 19일 결국 숨졌다. 교사인 그는 방학 중에도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피의자는 해당 장소에 CCTV가 없다는 점을 노렸다고 한다.

일상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 범죄만은 아니다. 폭우, 폭염, 산불과 같은 자연 재해도 끊이지 않는다. 이상 기후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으면서 즐거워야 할 여행이 '지옥'으로 변하는 일도 생겼다. 지난 5월 괌에서 태풍 '마와르'에 발이 묶였던 관광객들은 그곳을 '괌옥'이라 불렀다.

이달 1일 막을 올린 ‘2023 새만금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대회’에 참석했던 대원들에겐 폭염 속 야영장이 악몽과도 같았을 것이다. 물웅덩이, 온열질환, 벌레, 비위생적 화장실 등 각종 보건 위생 문제가 이들의 안전을 위협했다. 기후 위기 시대에 한여름 대회를 강행하면서 행사 준비에 소홀했던 주최 측의 안일함은 거센 비판을 받았다.

지난달 14명의 생명을 앗아간 충북 청주시 오송읍 궁평제2지하차도 참사는 어떤가. 3년 전 3명의 인명 피해를 낸 부산 동구 초량지하차도 참사와 판박이라는 지적이 나오지만, 컨트롤 타워 부재라는 ‘무대책 행정’은 달라진 게 없다. 역시 ‘각자도생’하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얼마 전 만난 기후 전문가는 해수면 상승에 대비한 국가 차원의 대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바다를 낀 부산은 해변에 아파트가 많아 수해가 일상화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온난화로 한반도 근처에서 태풍이 발생하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는데, 만조와 같은 극단적 상황이 겹칠 경우 복합 재난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미 미국에서는 ‘기후 젠트리피케이션’이란 말마저 생겨나고 있다. 해안가 고급 주택에 살던 부유층이 높은 지대로 이사하면서 원래 살던 주민이 밀려나는 현상이다. 우리나라가 아직 기후 위기에 둔감한 것은 앞서 극한 재해에 맞닥뜨린 다른 나라에 비해 운이 좋았다는 이야기마저 나올 정도다.

범죄와 재난, 신종 감염병 등으로 안전한 곳을 찾기 힘든 시대다. 정부와 지자체는 더 이상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상 동기 범죄의 원인이 사회적 고립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들의 소외감이 범죄로 이어지지 않게 사회적 안전망을 마련해야 한다. 강력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CCTV 사각지대를 찾아 해소하는 섬세한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기후 위기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영국, 네덜란드, 독일의 ‘경제기후부’ 같은 부처를 신설하는 등 국가 시스템도 정비해야 한다. 재난에 대비해 생존 키트를 구비한 가방을 싸두고, 범죄의 대상이 될까 두려워 호신용품을 알아보며 하루하루 살아남아야 하는 국민들의 불안을 헤아려야 한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황궁아파트’ 같은 최후의 안전지대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출퇴근 길이든, 대낮이든 한밤이든, 언제 어디서나 안전한 사회가 진짜 유토피아 아닐까.


이자영 기자 2young@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