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생존자의 제1조언 “일단 살아서 일상 잡아라” [제3자가 된 피해자]

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피해자로 4년, 활동가로 10년
얼굴 없는 ‘연대자 D’ 인터뷰

제3자 소외 경험 딛고 활동 나서
법원 방청석에서 피해자와 연대
재판 방청 시민 참여 운동 이끌며
‘우리가 있다’는 지지 메시지 보내
“피해자에 정보 통지 의무화 시급”

경기도 성남시 서현역 한 대형 백화점 인근에 지난 3일 발생한 '분당 차량 돌진 및 흉기 난동'으로 사망한 피해자를 추모하는 꽃다발과 커피 등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경기도 성남시 서현역 한 대형 백화점 인근에 지난 3일 발생한 '분당 차량 돌진 및 흉기 난동'으로 사망한 피해자를 추모하는 꽃다발과 커피 등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서울 신림역, 경기도 성남시 서현역 흉기 난동, 서울 신림동 등산로 성폭행 살인 등 무차별 범죄의 피해자가 속출한다. 전 국민을 충격과 공포 속에 빠뜨린 범죄 가해자에게 주목하는 사이 수많은 피해자는 하나둘 잊혀진다. 여전히 피해자의 자리는 ‘제3자’에 머무른다.

지난 10년간 전국의 재판을 방청하며 범죄 피해자 지지 활동을 익명으로 이어온 ‘연대자 D’를 최근 비대면으로 만났다. 그는 피해자들에게 말한다.

“일단 살아서 일상을 붙들고 있어요.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고 다듬는 사람들이 당신 곁에 있습니다. 그러면 같이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연대자 D는 사법 시스템이 범죄 피해자를 배제하는 과정을 감시하고 비판해 온 성범죄 피해자이면서 활동가, 연대자다. D를 온라인 화상회의 플랫폼 줌을 통해 만났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18일 오후 성폭행 사건이 일어난 서울 관악구 신림동 소재 야산 등산로를 찾아 박민영 관악경찰서장과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18일 오후 성폭행 사건이 일어난 서울 관악구 신림동 소재 야산 등산로를 찾아 박민영 관악경찰서장과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D는 피해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가장 문제라고 강조한다. 그는 “피해자가 모든 재판에 참석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라며 “나는 그런데도 내 사건의 모든 재판에 참석했다. 안 가면 정보가 없어서였다. 수사나 재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떤 수사당국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이 공분을 산 이유 중 하나로도 ‘알 권리’를 빼앗긴 피해자 처지를 꼽았다.

D는 전시성 법안 발의를 넘어 실질적인 피해자 통지 절차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경찰에서 수사 진행 상황을 설명하고, 검찰로 넘어갔을 때 송치 여부를 전달하고, 불송치된다면 그 이유와 이후 보완수사 상황을 통지하는 것이다. 현재 발의된 개정 법안은 계류 중이지만 피해자들은 기본적인 사법절차조차 전달받지 못한다. 법 개정이 이뤄져도 형식적인 내용에 그칠 것으로 우려된다.

“법안이 없어서가 아니다. 피해자를 보호할 절차가 있어도 피해자에게 설명해주는 주체가 정해지지 않고 실행 절차가 마련되지 않았다. 형사 사법 시스템의 존재 의의를 생각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 운영 절차가 없다 보니 결국 피해자는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

그는 사법시스템의 공백을 연대로 채운다. 2010년 직접 성범죄를 겪고 4년 동안 법정에서 싸웠던 D는 이후 피해자 편에 섰다. 외로운 싸움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피해자에게 조언하고, 법정 방청석에 함께 앉았다. 그렇게 10년간 전국 법정을 오가며 성폭력 사건 공판에 참석하는 ‘재판 방청 연대’를 이어왔다.

법정 구도만 봐도 피해자의 위상이 드러난다. 검사와 피고가 당사자인 형사재판 법정에서 피해자의 자리는 방청석 외엔 존재하지 않는다. D와 시민의 재판 방청 연대는 ‘피해자 뒤에 우리가 있다’는 피해자 지지이자 재판부 감시다. 피해자가 방청석에 ‘유령’으로만 존재하지 않게 하겠다는 연대의 몸짓인 셈이다. 감시 활동은 법정 내 피해자 진술권 확대로 연결됐다. D는 개인 연대는 물론 10년간의 방청 연대 자료를 매뉴얼과 체크리스트로 만들어 배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당신들의 경험이 다른 피해자들에게 어떤 힘이 되는지 지켜봐주십시오. 그 힘이 어떻게 시스템과 사회를 바꾸는지 확인해주십시오. 당신들의 존재가 다른 이들에게 희망임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D의 저서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에서 그가 피해자에게 보낸 말이다.



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