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권의 핵인싸] 과학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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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물리학과 교수

방류된 후쿠시마 방사선 오염수
범지구적 영향 상상조차 어려워
의심·반론 여지 말살해선 안 돼

과학은 데이터를 객관적으로 검증·분석하고 어떤 결론에 대한 확률적 가능성을 예측한다. 그래서 어느 경우에도 100% 확실하다고 말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이야말로 확실한 답을 줄 것이라는 일반인들의 기대는 그래서 사실 잘못된 것이다. 최근 널리 회자되는 양자역학이야말로 모든 현상을 확률적 가능성으로만 설명하는데, 그나마 이 가능성조차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범위에 국한된다. 그래서 후쿠시마에서 희석시켜 방류하고 있는 방사선 오염수의 수치는 국제적 허용치보다 훨씬 낮으며 이를 근거로 지금 당장 우리 인간에게 치명적일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은 추론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 어업 종사자들과 소비자들은 크게 걱정하지 마시기를 바란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몸담고 있는 이 지구 생태계에 미칠 연쇄적인 가능성은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다. 말 그대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방사선 방재는 ‘알라라(ALARA: As Low As Reasonably Achievable,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적게)’를 원칙으로 한다. 즉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 국제적으로 공인된 방사선 허용치는, 그 이상은 인체와 자연계에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계치라는 뜻이지, 이 허용치보다 낮으면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엄청난 양의 물로 희석시켜 규제를 무력화한 꼼수와는 상관없이, 이번 후쿠시마 방사선 오염수의 방류에서 과학적으로 확실한 사실은 어마어마한 양의 새로운 인공 방사선 원소들이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한 바다를 통해서 이 한정된 지구 행성의 곳곳으로 널리 널리 퍼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짧게는 수만 년 길게는 수억 년 동안 각종 어패류와 해삼·멍게 같은 연체동물, 각종 해초류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플랑크톤, 다양한 생물 및 무기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미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든 환경적 요소를 통해 아주 복잡하고 다양한 축적과 변화의 형태로 끊임없이 연쇄적으로 이어질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것이 지구 생태계에 어떤 치명적인 변화를 가져올지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원전사고 지역인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지역의 생태는 그 자체로 대량의 방사선 유출이 자연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의 단서가 될 아주 귀한 연구 대상이다. 최근 캐나다에서는 ‘일본 없이는 살 수 있지만, 바다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이 지구 생태계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이렇게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할 엄청난 범지구적 영향을 끼치는 이 일이 무려 30년 동안이나 계속될 예정이다.

최근 100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유감스럽게도 핵폭탄을 비롯한 크고 작은 원전사고를 통한 국소적인 방사능 유출이 있어 왔고, 그때마다 우리는 아직 경험해 보지도 못한 재앙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접근 금지구역을 설정하고 일체의 생태적 확산을 막아 온 일들이 있었다. 사실 일본도 그래야 했고 그럴 수도 있었다. 단지 가장 싸고 손쉬운 방법을 택했을 뿐이다. 이렇게 국소적 원전재난을 거의 온 지구의 가장 광범위한 영역에 방사시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전 지구적 문제로 만든 예는 역사상 일찍이 없었다. 심지어 국제사회의 방조와 우리나라의 양해 하에 만천하에 드러내 놓고 당당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바로 그 돌이킬 수 없는 이 행성 전체에 대한 방사선 오염을 방조하고 정당화시켜 준 것이다. 모르긴 해도 앞으로 발생하게 될 방사선 폐기물도 누구나 비슷한 방식으로 정당하게(?) 처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셈이다.

방사선 수치를 측정하고 그 수치가 허용치를 초과하는지 비교하는 일은 ‘과학’이 아니라 전문가도 필요 없는 ‘기계’의 일이다. 과학은 측정한 데이터에 기초하여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상상하거나 알아낼 수 없는 모든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발전시켜 새로운 미지의 영역을 개척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의심’과 ‘탐구’의 대상이다. 의심이나 반론의 여지를 말살하고 과학이란 이름으로 믿으라고 강변하는 것이야말로 비(非)과학을 넘어 반(反)과학적인 처사다. 말할 수 있는 데까지만 말하는 게 과학이다. 모르는 데까지 확신을 갖는 일은 과학의 대척점에 있는 무서운 일이다.

최근 들어 부쩍 인간을 짐승과 구별되게 하는 네 가지, 즉 불쌍히 여길 줄 아는 마음,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과분함을 아는 마음, 분별할 줄 아는 마음이 있다는 옛 성현의 말씀이 유난히 많이 생각난다. 네 가지는커녕 한 가지라도 가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 자신들이 방사선보다도 더 무서워지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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