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팬덤과 '철회 문화'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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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에서) 접근 차단을 없애고 노출 제한과 블랙리스트·추방·철회를 금지하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2021년 7월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을 검열 혐의로 제소하면서 자신을 포함한 보수 의견이 배척당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언급된 ‘철회’는 유일하게 플랫폼이 아닌 사용자가 주도하는 배제 유형이다. ‘철회 문화’(cancel culture)로 알려져 있는데, 유명인의 부적절한 언행을 이슈화해 집단적으로 ‘손절’하는 것이다. 미국 래퍼 카니예 웨스트는 트럼프를 옹호하고 노래까지 발표한 탓에 해시태그 ‘#Cancel’ 쓰나미 사태를 겪었다. 그 여파로 다국적 광고주들을 잃었다.

한국에선 ‘철회 문화’로 불리지 않을 뿐 팬덤의 결집·행동·파급력은 전 세계 최고다. 지난 3월 걸그룹 ‘에스파’의 카리나가 열애를 인정하자 일부 팬들이 딴지를 건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트럭 전광판 시위를 통해 ‘팬이 준 사랑이 부족하니? 왜 팬을 배신하느냐?’고 비난하고 ‘하락한 앨범 판매량과 텅 빈 콘서트 좌석’을 위협했다. 빗나간 애정 표현이다. 무리한 행동을 굳이 해석하자면 ‘팬들이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혹은 ‘더 성장해야 되는데 벌써 연애질이냐’로 읽힌다. 이제 팬덤은 무조건 따르는 ‘신도’ 유형에서 ‘부모’처럼 지도·간섭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팬덤이 통제 불능인 것처럼 보여도 일탈을 처벌하는 집단 지성도 발휘된다.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의 ‘지역 비하’에 분노한 구독자 20만 명이 ‘구독 취소’라는 회초리를 들었다. 음주운전 거짓 해명으로 지탄을 받은 가수 김호중의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 공연은 6000석의 예매 취소가 쏟아졌다. 정당한 분노의 표현으로 지지를 철회한 셈이다.

정치권도 팬덤에 의존하니 ‘철회’를 맞닥뜨리는 게 숙명이다. 최근 주목되는 사건은 더불어민주당 당원 중 국회의장 후보 경선에 반발해 탈당한 수가 2만 명에 이른 일이다. 결단하는 지도자와 충성하는 지지자라는 기존 정치 문법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다. 이를 극성 정치 팬덤으로 폄하해 버리면 정당 리더십과 의사소통 구조 변동의 시사점을 놓치게 된다.

이제 충성 팬덤을 거느려야 존재감이 확인되고 나아가 경쟁력을 발휘하는 시대다. 구독 경제에서는 구독과 취소의 결정권을 이용자가 쥐고 있다. 지지 철회는 곧 권력이다. 연예·스포츠 스타, 인플루언서, 기업(브랜드), 정치인(정당)…. ‘철회’ 앞에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됐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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