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달식의 일필일침] '마을지기 사업' 부산 복지의 희망 싹으로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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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어르신들 생활 속 문제 해결해 줄
'맥가이버' 같은 만능 재주꾼 필요해
사회적 약자 있는 곳이면 어디든 해당
노인 인구 비중 높은 부산 장려할 일
'찾아가는 마을지기' 등 서비스 확장
지역서 내세울 만한 사업으로 키우길

한 달에 한 번 정도 시골 고향에 가는 편이다. 홀로 계신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해 늘 마음 한구석엔 송구함이 앞선다. 근래 고향에 갔을 때다. 집에 가보니 몇몇 생활용품이 고장 나 있었다. 냉장고는 냉장실 냉기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고, 화장실 물탱크의 물 조절 볼 탑은 연결 부위가 부러져 있었다. 나일론 빨랫줄은 낡아 햇볕에 옷을 널면 그 부스러기가 옷에 허옇게 묻어 나왔다.

냉장고는 서비스센터에 연락해 수리하고 나머지는 재료를 직접 사다 교체했다. 이번에는 시기가 잘 맞았다. 다행히 고향에 내려갔을 때 고장 난 것들을 수리·교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간혹 겨울철에 보일러가 고장 나거나 수도꼭지가 얼어 탈이 나면 손재주 좋은 이웃집 형님이 곧바로 고쳐주곤 했다. 그는 고장 난 걸 잘 수리해 줘 동네에선 1980~1990년대 TV에 나오던 만능 재주꾼 ‘맥가이버’로 통했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이웃집 형님에게 고쳐달라 부탁할 법도 했지만, 너무 자주 얘기하는 것도 미안하고 눈치가 보여 못 했다면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일이 한꺼번에 많아진 거였다고 말씀하셨다.

요 몇 년 새 고향을 오고 갈 때면 마을 어르신들의 생활 속 문제들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사람이 동네에 상주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이를테면 맥가이버 같은 사람 말이다. 자식들 대부분이 객지로 나가 있어 도움을 요청할 젊은이들이 없는 시골 어르신들에게 맥가이버 같은 사람은 너무나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맥가이버의 필요성’은 시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저소득층, 한부모 가정,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등 우리 주변의 사회적 약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필요하다. 다행히 부산은 수년 전 맥가이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2015년부터 ‘마을지기사무소 사업’이란 이름으로 시행하고 있다. 마을지기와 만물수리사가 상주하면서 집 수선, 공구 대여, 무인택배 보관 등 소위 ‘동네 맥가이버’ 역할을 한다. 주민이 마을지기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재료비와 출장비 등으로 일정액을 내면 된다.

부산에서 처음 이 사업을 시작할 때는 마을지기사무소가 13곳이었다. 차츰 주민의 호응을 얻어 2020년에는 50곳으로 늘어났다. 2022년 부산 금정구는 연간 1278건, 부산 중구는 1200건의 서비스를 주민에게 제공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일몰제였다. 사무소 설치 후 3년간 부산시가 예산을 지원하고 이후에는 각 구·군 자체 계획으로 전환해야 했다. 이렇게 되자 마을지기사무소는 24곳으로 쪼그라들었다. 마을지기사무소가 줄어든 것은 각 구·군 예산 사정이 여의찮아서다. 매년 사무소 한 곳당 운영비가 6000만~7000만 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산 부족으로 이 사업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최근 부산시는 마을지기 지원 사업을 재추진할 뜻을 비췄다. 언론의 눈치를 보며 마지못해하는 느낌도 있다. 하지만 지역 내 취약계층과 복지 사각지대 주민들을 위해 마을지기 사업을 펼치는 것은 오히려 지자체가 앞장서 장려할 일이다.

부산은 노인 인구 비중이 전체 인구의 20%가 넘은 초고령 도시다. 그렇기에 노인에게 더 절실히 요구되는 마을지기는 부산에 꼭 필요한 사업이다. 부산은 다른 곳과 비교해 일상적인 편의시설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취약할 수밖에 없는 산복도로 지형을 가졌다. 그래서 더 적합한 제도기도 하다. 따라서 이참에 마을지기 사업을 더 세밀하게 다듬어 부산이 내세울 만한 대표적인 복지 사업으로 만들었으면 한다.

최근 들어 부산시는 도시 인구의 고령화와 1인 가구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당연히 고립된 노인도 늘어나면서 관계망 회복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다. 나이 들면 말벗이 최고라 했다. 인공지능(AI)이 어르신의 말벗이 되는 시대에 살지만, 마을지기 역시 단순히 어르신들의 생활 불편만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따뜻한 말벗이 되어줄 수 있다. 관계망 복원 역할도 얼마든지 가능하단 얘기다.

마을지기 사업의 서비스 영역도 넓혀갔으면 한다. 소규모 아파트 단지나 산복도로 등 거주민을 위해 ‘찾아가는 마을지기’도 운용할 필요가 있다. 마을지기 사업이 좀 더 탄탄해지기 위해서는 부모가 거주하는 지역의 마을지기사무소에 ‘고향사랑기부제’처럼 자식이나 친척들이 일정 금액을 기부할 수 있게 하는 것도 검토해 볼 수 있다. 복지 전문가들은 “마을지기 사업은 한 동네에 온기를 불어넣고, 침체한 도시에 건강한 변화를 끌어내는 ‘촉매제’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달려가는’ 마을지기 사업이 부산에서 제대로 꽃피길 기대해 본다. 이는 갈수록 느슨해지는 도심 속 마을공동체를 회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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