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수군진에서 만든 무기로 왜와 싸워 이겼다 [자주국방 인in人] 12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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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철 고흥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이 이순신 장군이 수군 만호로 최초 부임한 고흥 발포진에서 지형을 설명하고 있다. 송호철 고흥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이 이순신 장군이 수군 만호로 최초 부임한 고흥 발포진에서 지형을 설명하고 있다.

[자주국방 인in人] 12. 임진왜란과 의로운 백성, 그리고 현장에서 만든 화약무기


김지가 승자총통을 개발한 지 20여년 만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당시 조선은 아무런 대비책이 없었고, 당쟁에 빠져 정세 판단을 소홀히 했다고 배웠다. 그러나 이런 관점이 혹 식민사관의 영향은 아닐까.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뒤 왜곡한 역사가 어디 '임나일본부설'뿐이겠는가. 화력조선 시리즈를 기획한 국립진주박물관이 화력 무기의 관점에서 임진왜란을 바라본 바에 따르면 조선은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다만, 조선은 전쟁을 예상했지만 예측한 것보다 왜적은 대규모였고, 일본 열도에서 내전으로 단련된 왜군은 잘 훈련되고 강했다. 당시 조선이 보유한 화약 무기 등으로는 왜군 4만 명 정도의 침입은 충분히 물리칠 수 있는 전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침범한 왜군의 규모는 14만 명이 넘는 대군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오직 죽을 순 있어도 물러설 순 없다는 '사즉생필사즉'의 정신이 있었고, 승자총통과 총통으로 무장한 육군과 해군이 있었다. 특히 조선 해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뛰어난 전술로 왜적을 압도했다. 전쟁 초반 육지에서는 밀렸지만 수군은 천, 지, 현, 황의 대형 총통으로 왜선을 일거에 박살 냈다. 특히 주력 함선인 판옥선은 우수한 조종성을 바탕으로 함포 사격이 용이해 왜선을 압도했다. 그리고 조선에는 나라를 기어코 지키고자 했던 의로운 백성들이 있었다.


국립진주박물관에 전시된 임진왜란 당시의 군선인 판옥선(왼쪽)과 거북선. 판옥선 제작에는 정걸 장군의 역할이 컸다. 국립진주박물관에 전시된 임진왜란 당시의 군선인 판옥선(왼쪽)과 거북선. 판옥선 제작에는 정걸 장군의 역할이 컸다.

충무공 이순신의 멘토 정걸 장군

1598년 정유재란 시기 흥양(지금의 전남 고흥) 현감이었던 최희량 선생의 전쟁보고서 '임란첩보서목'을 좇아서 고흥군에 갔다. 500년 전 역사 속으로 안내를 해준 송호철 고흥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은 먼저 백전노장 정걸 장군을 아느냐고 물었다. 정걸(1514~1597) 장군은 전남 고흥군 포두면 출신 무장으로 경상우수사, 전라좌수사, 전라우수사와 창원부사 등을 지냈다. 1555년 을묘왜변 당시에도 왜구를 무찔렀다. 을묘왜변은 조총으로 추정되는 왜구의 화약무기가 등장한 전투다. 그런 연유일까. 송 위원은 정걸 장군이 화포 생산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했다.

"정걸 장군이 각종 화약무기류 총통 제작을 지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보다 31살이 많은 정걸 장군은 북방 여진족과 남쪽의 전장에서 맹활약한 백전노장으로 화약무기류를 만들었고, 이런 연유로 고흥에는 화약무기 관련 기술자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송 위원은 그 때문에 고흥에서 화약무기를 원활하게 생산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육군과 달리 조선 수군은 부산포와 진해 안골포를 공격할 정도로 막강했다. 특히 78세나 된 고령의 정걸 장군은 이순신의 군사참모격인 조방장으로 참전한다. 1592년 5월 7일 이순신 함대의 첫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활약했고, 7월에는 한산도대첩에 참전했다. 9월 부산포해전에서도 정걸 장군은 참전해 공을 세운다. 이후 충청수사로 행주대첩에서 승리를 이끈 권율 장군에게 화살을 전달하고 함께 싸웠다.

"정걸 장군이 이순신 장군의 멘토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고흥의 뱃길 등 지리에 밝고, 지역의 자원을 잘 활용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장군도 정걸 장군의 능력을 높이 사 자문을 받은 것이라 여겨집니다." 송 위원은 정걸 장군을 알아야 이순신의 활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대장군전의 위엄.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천자총통에서 발사한 무기. 국립진주박물관이 재현 전시한 것이다. 대장군전의 위엄.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천자총통에서 발사한 무기. 국립진주박물관이 재현 전시한 것이다.

안골포 해전과 대장군전의 위엄

한산도대첩에서 승전한 조선 수군은 부산포로 진격한다. 가덕도로 가던 도중 조선 수군은 진해 안골포에 주둔한 왜의 수군장 구키 요시타카(1542~1600)를 강력한 화약무기로 초토화한다. 이 승전이 안골포해전이다. 한산도대첩과 부산포해전에 참전한 정걸 장군 역시 이 싸움에 참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화약무기 특별전 '화력조선'을 기획한 국립진주박물관은 왜선에 박힌 대장군전을 연출해 전시했다. 국립진주박물관 김명훈 학예연구사는 "대장군전은 조선시대 총포에서 사용한 화살 모양 발사체 중에 가장 컸다"며 "통나무로 만들어 길이가 247.5cm나 되는 자이언트 화살로 생각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조선시대 대형 총통인 천자총통에서 쏜 발사체에는 철촉과 철우(철제 깃)이 달려 있었는데 그 위력이 마치 대들보가 날아드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해전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왜 수군장 구키 요시타카는 대장선에 날아든 대장군전에 얼마나 혼이 났던지 배에 박힌 대장군전을 수습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철촉이 사라진 상태로 현존하는 조선 수군의 대장군전은 구키 가문이 기탁해 일본 사가현 가라쓰시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임진왜란 당시 실제 사용한 대장군전 중 유일하게 남은 이 유물은 철촉은 없는데 전체 길이가 182cm라고 한다.

이 유물이 조선의 유물인 것이 확실한 것은 유물 명문에 '가리포'라는 지명이 있다는 것이다.

"가리포는 완도에 있는 지명입니다. 일본에 있는 대장군전은 조선 수군이 만들어 화포로 쏜 유물이 분명하다는 증거입니다." 김 연구사는 대장군전은 임진왜란 당시 고흥과 완도 등 수군진이 있는 지역에서 직접 무기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도 알 수 있는 유물이라고 했다. 그럼 왜군은 왜 대장군전을 챙겨 갔을까. 왜군이 대장군전을 수습해 가져간 것은 '패전의 변명을 위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뻥 하고 대들보가 날아드는데 어떻게 조선 수군을 이깁니까"라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변명하기 위해서라는 설이다.


거금대교와 소록도가 보이는 곳에 있는 절이도해전 기념탑 명군의 블랑포 조형물. 녹도만호 송여종의 활약으로 조선 수군의 부활을 알렸으며 조·명연합군 해전으로 유명하다. 거금대교와 소록도가 보이는 곳에 있는 절이도해전 기념탑 명군의 블랑포 조형물. 녹도만호 송여종의 활약으로 조선 수군의 부활을 알렸으며 조·명연합군 해전으로 유명하다.

'임란첩보서목'과 좌수영의 자랑 고흥

고흥에서 판옥선 등 전선과 천자총통, 승자총통 등 화약무기류를 직접 만들었다는 임란첩보서목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것이 당시 전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송 위원이 설명했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육지의 대다수 화약무기 제조소가 파괴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한양에 있던 군기시도 왜군이 점령하면서 훼손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격을 위해 무기를 만들 곳은 각 군진이 있던 지방 현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노을이 아름다워 분위기 좋은 카페가 많이 들어선 전남 완도군 가리포는 500년 전 수군진성이 있던 곳이었다. 가리포 수군진성은 1521년 세웠는데 남해안에서 중요한 군진 중 하나였다. 이 수군진에서 대장군전을 만든 것이 일본에 있는 대장군전으로 증명됐다. 이는 임란첩보서목에 나열한 군수품 현지 생산 사실을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송 위원은 "고흥은 실상 5군데의 군진이 있었다. 흔히 1관 4포라 해서 발포, 녹도, 여도, 사도진 등 4포와 흥양현을 이야기하는데 흥양현에도 수군진이 있었으니 5군진이라 해야 타당하다"고 말했다. "사실 고흥 나로도가 정유재란 당시 임시 통제영이었습니다. 좌수영이 멀리 군산 앞바다 위도까지 밀려갔다가 1598년 1월 남하면서 고흥이 최전선이 되었습니다." 송 위원이 전황을 설명했다. 송 위원은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고흥읍성에서 보면 당시 흥양현을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가 남문인데 임란첩보서목에도 남문 밖에서 전투를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송 위원은 당시 대장간이 있었던 '쇠쟁이' 성촌 마을과 칼 만드는 대장간이 있었던 갈고개를 가늠해 주었다.

고흥군청 김일동 학예연구사도 "당시 전라좌수영은 여수 진남관에 본진이 있었지만 예하 수군진의 절반이 고흥에 존재했다"며 "고흥 곳곳에 군진의 물자를 조달하던 봉산이 있었고, 수군진의 하나인 발포진에서는 제련소 유적도 발굴됐다"고 밝혔다.


발포진은 천혜의 요새다. 앞쪽에는 동백섬이 진을 가려준다. 한옥 건물은 사도진 객사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발포진은 천혜의 요새다. 앞쪽에는 동백섬이 진을 가려준다. 한옥 건물은 사도진 객사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발포진에 화약무기 만들던 제련소

발포진은 고흥 읍내에서 녹동으로 가는 길에 있다. 고흥반도의 끄트머리다. 발포진은 이순신 장군과의 독특한 인연이 있다. 이순신 장군 북쪽 변방에 있다가 1580년 최초로 수군 관직을 맡은 이곳 발포진 만호였다. 전라좌수사 관할의 발포진에서 이순신은 1년 6개월이라는 짧은 수군 생활을 한다.

"발포 만호로 계실 때 좌수사 성박이 심부름꾼을 보내 오동나무를 베어 가려 했습니다. 거문고를 만드는데 쓰겠다는 말에 만호 이순신은 진에 있는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니 함부로 벨 수 없다고 심부름꾼을 돌려보냈습니다." 송 위원은 강직한 이순신을 알려주는 일화 때문에 발포진 자리에 오동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했다. 발포진에 간 날 오동나무꽃이 한창이었다. 송 위원은 독특한 이야기를 했다. 오동나무가 무기 재료라고 설명했다. "판옥선은 노꾼이 전투원보다 많았습니다. 이 오동나무는 노 끝의 가장자리를 감싸 단단한 노가 물에 잘 뜨게 하는 부력장치로 활용했습니다." 엄중한 수군진에 한가해 보이는 오동나무가 있었던 이유를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발포진 이순신 장군 조형물 주변에 있는 오동나무. 막 꽃이 피었다. 발포진 이순신 장군 조형물 주변에 있는 오동나무. 막 꽃이 피었다.

예나 지금이나 윗사람에게 밉보이면 출세하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오동나무 사건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순신은 결국 어렵게 맡았던 발포진의 최고 책임자인 만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렇지만 이때의 경험이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의 활약을 가능케 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발포진에서 제철 유적이 발견됐다는 고흥군청 관계자의 발언은 '군진 내에 존재했던 조병창'과 발포진에서의 총통 등 화약 무기 제조 사실을 강력하게 유추할 수 있는 증거다. 흥양현감의 전장보고서에 나오는 화약무기들도 직접 만들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고흥군청 김 학예연구사는 "제련소 유적 발굴 당시 자석을 갖다 댔더니 강력한 자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발굴 당시 기쁨을 전했다.


이은상이 지은 글로 세운 이 충무공 유허비. 발포진이 있는 마을에 1955년 세운 것이다. 이은상이 지은 글로 세운 이 충무공 유허비. 발포진이 있는 마을에 1955년 세운 것이다.

판옥선의 산실 선소

당시 수군진마다 선소(배 만드는 곳)가 있었는데 발포진에서 산 하나를 넘으니 판옥선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본읍 선소 터가 있었다. 도화천이 이어지는 곳은 도화면 덕흥리였다.

"저기 오래된 나무 자리가 선소 창(창고)이 있던 곳입니다. 지금도 땅을 파면 기와편 등이 쏟아집니다. 방조제로 막혀 도화천이지만, 예전에는 바닷물이 들어오던 바다 자리였어요." 송 위원은 본읍 선소의 지형을 잘 보라고 알려주었다. "방조제 앞쪽에 있는 산은 섬입니다. 육지가 아니죠. 바다에서는 이곳 선소가 보이지 않지요. 조상들은 이런 천혜의 자리에 판옥선을 만드는 선소를 차린 겁니다." 송 위원은 주변 산들이 다 봉산이라고 했다. 봉산은 국가가 관리하는 국유재산으로 누구든지 들어가서도 안 되며, 나무를 베는 행위는 특히 엄격히 금지했다고 설명했다.

"바다 쪽은 섬에 막혀 보안이 유지되고, 주변에 산이 가까워 판옥선을 만들 재료가 지천이었습니다. 건조한 배는 언제든지 바다라 나갈 수 있는 요지에 선소가 있었습니다." 다만 이런 고흥의 지형이 꼭 유리한 것만은 아니라고 송 위원이 말했다.


대동여지도의 고흥. 아기 손가락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만이 깊숙해 요새화된 지역이 많았으나 방어도 힘든 구조다. 대동여지도의 고흥. 아기 손가락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만이 깊숙해 요새화된 지역이 많았으나 방어도 힘든 구조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고흥반도는 아기 손가락처럼 깊은 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방에서 적이 처들어올 수 있는 열악한 구조입니다. 이곳 선소 자리도 한참 위쪽까지 배가 드나들 수 있었지요." 송 위원은 왜구가 침입하면 큰 배에서 작은 배로 갈아타고 물길을 따라 노략질을 했다며 고흥 읍성 남문에서의 전투도 이런 지형 때문에 왜구가 읍성 목전까지 침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흥양목장 관아터인 관중마을회관 옆에 있는 조선시대 관목관 철비. 흥양목장 관아터인 관중마을회관 옆에 있는 조선시대 관목관 철비.

철비와 붉은 돌 찾은 향토사학자의 집념

"어떤 이들은 '철도 생산되지 않는 고흥에서 무슨 총통을 만들었겠냐'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저는 고흥에서 철이 생산되지 않았다는 말을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송 위원은 구체적으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이곳에서 화포를 녹여냈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했다. 이날 함께 갔던 외교관 출신 이상완 블로거는 고흥읍에 있는 주월산에 동광이 있었다고 말했다. "주월산에 동굴이 있었는데 어릴 때 거기서 술래잡기도 하고 6.25 때는 사람들이 피란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지인의 부친이 일제강점기 동광산을 운영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송 위원에 고흥의 철비 이야기도 꺼냈다. 철비는 고흥군 도양읍 관중마을 회관 앞에 2개가 서 있었다. 조선시대 흥양목장 관아터였던 이곳은 국영목장으로 말을 키우던 곳인데 이 목장을 관리하던 관목관의 선정비가 철로 만든 비였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도양목장을 둔전으로 개간하고자 건의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1596년 체찰사 이원익이 도양둔전의 보리 작황을 보고 감격한 이야기가 '난중일기'에 나와 있죠." 송 위원은 고흥에서 철이 생산되지 않았다면 두 기나 되는 철비가 세워지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도화천의 반짝이고 붉은 돌을 발견했고, 동학농민군의 화포 주조 증언을 채록한 송 위원은 "고흥에 수군진이 있었고, 당시에는 식량이든 무기든 자급자족해야 했기에 총통류까지 현지에서 생산했다는 설은 설득력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대장간이 있었던 고흥읍성 밖 쇠쟁이 마을터를 설명하고 있는 송호철 위원. 대장간이 있었던 고흥읍성 밖 쇠쟁이 마을터를 설명하고 있는 송호철 위원.

특히 읍성 근처의 대장간에서 각종 무기류를 만든 경험있는 기술자가 임진왜란 당시 여전히 활약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순신 수군의 주력이 이곳 고흥 출신이었을 겁니다. 정걸 장군 때부터 축적된 뱃길 정보와 각종 무기류 제작 정보가 이어진 것이죠. 역사는 이어지는 것이니까요." 송 위원은 역사의 인과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승자총통과 K시리즈 소화기의 연속성은 이렇게 조상의 자주국방 의지와 함께 면면히 흐른 것이 분명했다.


요산 김정한 선생은 1973년 11월 29일 국방부 조병창 건립 기념 비문에 이렇게 새겼다. '국방은 한 나라의 존립을 보장하는 최대의 요건. 방비를 등한히 해 외적의 침략을 받았던 치욕스러운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말자. 여기 자주국방을 다짐하는 무기 생산의 터전을 마련했다. 우람한 가동 소리는 조국의 영원한 안전과 자유를 굳건히 보장하리라.' 선생의 말씀을 축약했지만 대한민국 자주국방의 시원이 부산 기장군 철마면 전 국방부 조병창이다. 조병창은 (주)대우정밀로 민영화한 뒤 현재 SNT그룹(회장 최평규)의 SNT모티브로 발돋움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자주국방의 대의는 면면히 이어진다. 그 거룩한 여정에 묵묵히 복무한 이들을 발굴해 <부산일보>는 ‘자주국방 인in人 시리즈’를 지면과 온라인에 연재한다. 모든 영웅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를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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