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가방이 되고 그림이 되다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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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징 조각전 ‘무거운 가방’
14일까지 부산미광화랑
철 가방에 여행 이야기 담고
녹물로 삶의 기억 그려내고
“철은 순진하고 정직한 존재”

우징 작가가 영국 벼룩시장에서 1파운드에 산 가방(왼쪽)을 철 조각으로 재현했다. 오금아 기자 우징 작가가 영국 벼룩시장에서 1파운드에 산 가방(왼쪽)을 철 조각으로 재현했다. 오금아 기자

철이 가진 순수성에 매료된 조각가.

우징 작가는 대학 시절 용접하는 선배의 모습이 너무 멋져 보였다고 했다. “용접 불꽃이 튀는데, 철판 위에 주황색 펜으로 드로잉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용접봉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다 싶었죠.” 우 작가는 30년 가까이 철을 이용해 작업했다. “철을 만지면서 ‘참 연약한 아이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내버려 두면 녹슬고, 계속 손을 대면 광이 나고. 여름에는 금방 더워지고, 겨울에는 금세 차가워지고. 철은 순진하고 정직한 존재입니다.”

팬데믹은 작가에게 새로운 작업의 계기가 됐다. 철로 ‘무거운 가방’을 만들었다. ‘무거운 가방’은 부산 수영구 민락동 미광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우징 작가 개인전의 제목이기도 하다. “코로나가 터져 벼룩시장에서 산 여행 가방을 못 쓰게 됐어요. 대신 위안을 얻기 위해 철로 가방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생각했죠.”

우징 작가의 철 가방 시리즈. 미광화랑 제공 우징 작가의 철 가방 시리즈. 미광화랑 제공
우징 작가는 가방 안에 영국 유학시절 쓴 지하철 티켓을 벼룩시장에서 산 박스에 넣어서 담아둔다. 오금아 기자 우징 작가는 가방 안에 영국 유학시절 쓴 지하철 티켓을 벼룩시장에서 산 박스에 넣어서 담아둔다. 오금아 기자

재료는 철인데 실제 오래 쓴 가방처럼 주름 잡힌 모습이 자연스럽다. 가방을 열면 안이 비어있다. “추상적이든 현실적이든 뭐든 채울 수 있게 비워뒀어요.” 우 작가는 각 가방 안에 작은 선물을 넣어뒀다. “유학 시절 벼룩시장에서 사서 모은 상자입니다. 런던의 지하철 티켓 등이 들어있어요.” 레진으로 고정한 티켓 위에는 센트럴라인 등 작가가 탑승한 지하철 노선도가 그려져 있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어렵게 떠난 영국 유학은 소중한 시간이었지만 힘든 기억도 남겼다. “사람들이 현지 출신인 줄 알 정도로 적응을 잘했어요. 그런데 자취방으로 돌아가면 영락없는 이방인으로 혼자였죠.” 작가는 당시의 감정을 ‘녹물 드로잉’으로 풀어냈다. 스코틀랜드의 탑, 자취방이 있던 건물, 부산 용두산공원, 작가 아버지의 집 등이 그림 속에 함께 어우러진다. 그림의 선은 철로 만든 액자로 뻗어 나온다. “녹물로 그린 그림을 철판 액자로 싸주는 것은 자기 짝을 만나게 하는 느낌이죠.”

우징 작가의 녹물 드로잉 'my memory with iron'. 미광화랑 제공 우징 작가의 녹물 드로잉 'my memory with iron'. 미광화랑 제공

녹물로 손을 그린 작품도 보인다. 자신에게 철을 잘라주던 철재상 반장님의 손, 철을 만지는 동료 작가들의 손 그림이다. “저는 철을 아주 잘 만지는 사람은 아닙니다. 대신 철에 대한 감정은 남다르다고 말할 수 있어요. 고철 트럭을 보면 장례차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죠.” 작가가 쇳가루와 녹물까지 신경을 쓰는 이유다.

우 작가는 10년 넘은 녹물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철조각을 하면 쇳가루가 나와요. 그걸 굵기별로 나눠 소금물에 2년 반 정도 담가 두면 잼처럼 끈적거리며 녹는 시기가 있어요. 그게 물감이 되는 거죠.” 작가는 ‘녹의 색’을 가장 자연스러운 색으로 인식했다. “녹물로 나의 기억을 그리는 거죠. 기억도 영원하지 않고 언젠가 지워질 수 있으니 그 기억을 보존하는데 녹을 쓰는 것이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징 작가. 오금아 기자 우징 작가. 오금아 기자

우징 작가는 자신이 작업하며 신은 낡은 안전화도 모아뒀다. “철로 안전화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다음에는 가방 안에 스케치를 담은 드로잉북을 넣어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작가가 스케치하던 순간의 기억과 생각이 여행 가방에 담겨 누군가에게 전달되고, 누군가 다시 자신만의 기억을 가방 안에 채워 넣는 일. 작가는 “그게 바로 예술”이라고 말했다. 우징 조각전 ‘무거운 가방’은 14일까지 열린다.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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