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 가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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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 소설가

새벽 세 시쯤 잠에서 깼는데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가을이네, 싶었다. 새벽바람이 차게 느껴져 창문을 닫으러 베란다로 나갔다가 달을 보며 귀뚜라미 소리를 한참 들었다. 도시 한 가운데에 있는 고층아파트에 그런 풀벌레 소리가 들려온다는 사실이 조금 의외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듣기에 좋았다. 서늘한 바람과 밝은 달, 그리고 고요 속에 쓸쓸하게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 이런 가을밤이면 마음속에 작은 별처럼 고요히 박혀 있던 어떤 그리움들이 휘영청 솟아오른다. 그 사람들도 그걸 알까, 한번쯤은 나를 생각할까, 궁금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모르더라도, 나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 다만 나를 스쳐간 바람이 그곳으로도 흘러가고 내 귀를 통과한 이 밤의 귀뚜라미 소리가 언젠가 그들에게도 들린다면 좋겠다.

나는 곤충을 좋아하는 편인데, 특히 날개를 마찰시켜 소리를 내는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곤충들, 그리고 딱딱한 외골격을 가지고 있는 사슴벌레나 풍뎅이 같은 딱정벌레 종류의 곤충들을 무척 좋아한다(내 소설에 곤충이 곧잘 등장하는 것은 그저 소설적 장치만은 아닌 것이다). 풍뎅이의 에메랄드빛 등딱지는 그 우아한 반짝임을 무엇에도 비길 수가 없고, 집게처럼 생긴 사슴벌레의 커다란 턱을 보면 그 위엄에 잠시 숨이 멎는다. 가을밤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는 또 어떤가.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마음속에 깊이 묻어둔 감정들이 어느새 흘러나오고 만다. 이솝 우화 때문에 사람들에게 게으름뱅이로 낙인찍혀버린 베짱이에게는 괜히 안타까운 마음마저 든다. 베짱이가 왜 베짱이인가. 깊은 가을밤에 ‘쓰윽 쩍 쓰윽 쩍’하고 우는 소리가 베틀질을 할 때의 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베짱이가 서양에서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우리 선조들은 베짱이에게서 게으름뱅이의 모습이 아니라 밤을 새워 베를 짜는 누군가의 모습을 찾아냈던 것이다.

성충이 되기 위해 탈피라는 과정을 겪는 곤충의 일생도 매혹적이다. 아이가 학교에서 장수풍뎅이 애벌레를 받아와 성충이 될 때까지 집에서 키운 적이 있었는데,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고 그 볼품없는 번데기가 매끈한 등딱지와 멋진 뿔을 가진 장수풍뎅이로 변신하는 과정은 실로 경이로웠다. 하지만 그 경이로움만큼, 탈피라는 과정을 통과하는 것이 곤충으로서는 무척 고되고 위험하고 실패할 확률도 높은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나서는 마음이 괜히 애잔해지기도 했다. 곤충의 딱딱한 외골격은 위풍당당하고 멋있지만 탈피를 하지 않으면 몸의 크기를 불릴 수도, 성체가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성장하기 위해서, 그들은 고통과 위험을 무릅쓰고 탈피한다.

고되고 힘들어도 꼭 넘어서야 하는 일,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 그런 변신의 과정은 우리 앞에도 놓여 있다. 우리의 피부는 신축성이 있으므로 외적으로는 탈피 없이도 성장할 수 있지만, 곤충의 외골격처럼 딱딱한 무언가가 우리 내부에도 분명히 존재한다. 단단함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는 힘이 되기도 하고 그 자체로 아름답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를 더 커질 수 없게 하고 늘 같은 모습에 머무르게 하는 한계가 되기도 한다. 나도 어떤 순간에는 탈피의 시기가 왔다는 것을 직감하기도 했지만, 그 고됨과 실패의 가능성을 무릅쓸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작은 껍데기 속에 웅크려 지내곤 했다. 하지만 곤충들처럼 죽음의 위험까지 각오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비겁하지 않았나 싶다. 카뮈는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라고 말했다. 매 순간 새 꽃망울을 피워내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가진 모든 잎들을 꽃처럼 물들이는 변화의 시간을 두려워하지 말고 건너가보자고, 가을밤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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