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언문 교지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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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7일, 왜군이 김해로 쳐들어왔다. 김해성은 나흘이나 버텨 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김해부사 서예원은 달아나고 성은 결국 4월 20일 함락된다. 선조 임금이 의주로 몽진(蒙塵·임금의 피란)한 지 1년이 훌쩍 넘은 1593년 9월. 선조가 전국에 한글로 된 교지를 내렸다. 이른바 ‘선조국문유서(宣祖國文諭書)’. 전세가 호전돼 한양이 수복되기 한 달쯤 전이라 왜군에 잡혀간 백성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내용, 장수들에게는 ‘왜군에 붙잡힌 백성들을 구출하라’는 명령이 담겼다. 유서는 임금이 군사권을 가진 관원에게 내리는 명령서를 가리키지만, 이 유서는 일종의 시국 담화문에 가깝다.

임금의 유서에 따라 즉각 행동에 나선 이가 권탁 장군이다. 경북 선산에서 선비로 지내던 그는 난을 당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김해로 와서는 밤낮으로 성을 고치며 민심을 수습하고 있었다. 장군은 선조의 유서를 품에 안고 적진에 몰래 들어 백성을 설득하고 100여 명을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 입은 상처로 몇 달 만에 숨지고 말았지만 선조의 유서는 안동 권씨 문중에 대대로 전해져 결국 역사에 남았다.

지난 9일 한글날을 맞아 ‘선조국문유서’ 원본(보물 제951호)이 김해한글박물관에서 공개됐다. 옥새인 ‘유서지보(諭書之寶)’가 세 군데에 선명히 찍힌 진품이었다. 이 진본은 한글로 작성한 최초의 공문서로서 16세기 말 조선 시대의 언어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문학 연구의 소중한 자료다. 그동안은 영인본이 전시되고 있었다.

훈민정음은 만들어졌지만 당대에는 언문(한글)에 대한 푸대접이 있었으리라 대부분 여긴다. 선조국문유서로 짐작해 볼 때, 임란 당시 백성의 상당수가 언문을 알았던 것 같다. 한글로 교지를 내린 뜻이 백성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궁중의 대비·중전을 포함한 내명부에서 훨씬 이전부터 언문으로 교지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 이후로도 공문서에 한글이 쓰인 사례는 적지 않다. 숙종이 죽은 뒤 왕대비였던 인원왕후가 1726년 언문 교지를 내려 영조를 즉위시킨 사례가 대표적이다. 성종 때 승려가 되는 것을 전면 금지하는 ‘금승법’이 제정되자 불교 신자였던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언문 교지를 내려 금승법 반대에 나선 일도 있다. 조선 시대 한글은 한문과는 또 다른 공식 문자였던 셈이다. 한글날 577돌에 즈음하여, 새삼 한글의 끈질긴 생명력을 실감하게 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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