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틀린 것

이현우 기자 hoor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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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FF ‘영웅본색’ 객석에서 터진 웃음
성차별적 묘사 등 불편한 장면들
폭압적 경찰권, 열악한 환자 인권 등도
30여 년 전 배경 요즘 눈높이엔 괴리
옳고 그른 기준 시대에 따라 바뀌어
변화 이끌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곳곳에서 내내 폭소가 터졌다. 비장한 홍콩 느와르 영화에 웃음소리라니. 처음엔 의아했다. 그러다 금세 알아차렸다. 그것은 쓴웃음에서 비롯된 탄식에 가까웠다. 부산국제영화제(BIFF) 초청작 ‘영웅본색’이 상영된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야외극장. 올해 BIFF를 뜨겁게 달군 홍콩 배우 저우룬파(주윤발)의 대활약을 기대하며 객석에 앉았다. 멋지게 등장한 ‘영원한 따거(형님)’의 강렬한 눈빛과 따뜻한 미소는 역시 일품이었다. 학창 시절 동경했던 배우의 빛나던 옛 모습에 가슴 벅차오르는 순간 뜻밖의 웃음소리에 분위기가 깨지고 말았다. 분명 진지한 장면이었는데 객석을 가득 채운 관람객들은 폭소했다. 20대로 보이는 바로 옆 여성 관객들은 수시로, 마지막까지 깔깔댔다. 희한하다 생각하며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깨달았다. 추억에 잠겨 미리부터 감흥에 젖은 중년 관객의 흐리멍덩한 눈으로는 잘 살필 수 없었던 장면들이 계속 이어진 까닭이었다. 1980년대 영화엔 요즘 잣대로 보면 맞지 않는 요소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여성 관객들의 실소가 가장 크게 터진 포인트는 여성 ‘재키’가 혼자 더러운 쓰레기를 치우는 장면이다. 그것도 남편이 집안에 어질러 놓은 쓰레기를. 극중 경찰인 장궈룽(장국영)은 범죄 단서를 찾기 위해 쓰레기 봉투를 집으로 가져와 마구잡이로 파헤친다. 그러면서 음식물 범벅의 쓰레기를 주방 바닥에 널브러뜨린다. 만족할 만한 정보를 얻은 그가 뜨거운 물을 맞으며 여유롭게 샤워하는 모습으로 신은 마무리된다. 그때까진 좋았다. 곧이어 아내 재키가 마스크를 쓴 채 홀로 묵묵히 주방 바닥을 치우는 모습에 ‘요즘 관객들’은 경악했다. 소리를 내며 헛웃음 쳤다. 지금의 기준으론 한참 잘못된 성차별적 구도를 향한 탄식이다. 여자는 남자 뒤치다꺼리나 하는 존재가 아닌데 말이다.

장궈룽이 총상을 입고 병원에서 수술받는 장면에서도 큰 웃음이 나왔다. 피 칠갑 중환자의 응급수술이 벌어지는 수술실. 지인들이 바로 옆에서 환자를 빤히 쳐다보며 안타까워하는 장면이다. 환자 인권은 온데간데없다. 근처 한 중년 관객이 아들로 보이는 청년에게 말했다. “옛날엔 병원에서 진짜 저랬어.” 어른 말씀을 들은 청년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뒤늦게 짐작해 본다. 그는 환자 보호 등을 위해 수술실 CCTV 가동이 의무화된 세상에 살고 있다.

영화 곳곳에선 경찰의 폭압적 위력도 무척 자연스럽게 묘사된다. 길 가는 사람을 무턱대고 밀어붙이며 검문해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몸을 샅샅이 훑는 수색에도 누구도 대응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당한다. 경찰이 용의자를 폭력적으로 대해도 상관없다. 그 시절 인권 의식을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영화 속 남성들은 줄곧 담배를 피워 댄다. 장소를 따지지 않고 자유롭게 흡연할 수 있던 때의 영화이니 어쩌면 당연하다. 미간을 찌푸리며 하얀 연기를 길게 내뿜는 모습을 그땐 다들 근사하게 여기기도 했다. 저우룬파가 미화 100달러권 지폐(위조지폐였지만)에 불을 붙여 담뱃불로 삼는 장면은 신드롬을 낳았다. 이제 시간이 흘러 사회적 분위기가 흡연에 관대하지 않다. 노골적 흡연신이 포함된 영상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시대다.

1987년 국내 개봉된 영웅본색은 당시 생활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땐 대체로 자연스럽게 여겨지던 일이 지금은 그릇된 것일 수 있다. 당시 환경이 지금의 눈높이로는 도통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거꾸로 예전엔 비정상이었지만 요즘은 올바르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36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사이 사회적 잣대와 가치관이 크게 바뀌었다. 옛 관객은 환호 일색이었지만, 요즘 관객은 때때로 달갑잖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다. 거친 분위기의 홍콩 느와르 영화 객석에서 줄곧 웃음이 터진 배경이다. 여럿이 ‘하하하’하는 소리는 요즘 관객의 불편한 마음에서 비롯된 쓴웃음 소리였다.

홍콩 배우들이 각광받던 시절에도 성차별과 권위주의 등을 깨기 위한 도전은 분명히 있었다. 그때는 비록 작은 목소리였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힘을 얻으며 마침내 세상의 기준을 바꿨다. 세상의 옳고 그른 기준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마든 변한다. 지금은 비록 소수 의견일지라도 언젠가는 모든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공통의 가치가 될 수 있다. 당장 범죄 피해자 인권 보호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우리 곁에서 크게 울린다. 성차별 해소와 소수자 인권 보장, 소외 계층 보호 등을 위해서도 더 크게 귀를 열어야 하는 이유다.

물론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도 있다. 롱코트 차림에 쌍권총을 든 사나이들의 의리를 담은 영화 영웅본색은 누가 뭐래도 영원한 걸작임에 틀림없다. 영원한 따거 저우룬파의 포근한 미소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다.

이현우 신문센터장 hooree@busan.com


이현우 기자 hoor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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