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에 재현된 사라지는 풍경들 [전시를 듣다]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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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종보 개인전 ‘한국정경’
11월 2일까지 미광화랑
직접 본 풍경에 이야기 더해
“사라진 원형 남기고 싶어”

설종보 '만어-경석'. 미광화랑 제공 설종보 '만어-경석'. 미광화랑 제공

“단테의 <신곡>을 보면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절에 어두운 숲에 들어가는 내용이 나와요. 숲에 들어가서 길을 찾는 과정을 거쳐야만 성장할 수 있어요.”

설종보 작가는 신작 ‘만어-경석’에서 혼자만의 시간,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표현하려 했다. 밀양 만어사 경석을 그린 작품에는 등불을 든 한 사람이 푸른 어둠 속에 서 있다. 설 작가는 철저하게 밤에,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돌들이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그 중 하나가 내 모습일 수도 있고, 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 느낌도 들었어요.”

부산의 중견작가인 설종보는 우리 산하를 다니며 만난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 왔다. 오는 11월 2일까지 열리는 ‘한국정경’전은 설 작가가 부산 수영구 미광화랑에서 가지는 네 번째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에서 설 작가는 부산 영도다리, 제주 가파도, 단양 도담삼봉, 보성 봇재 녹차밭, 서울 안국동 벚꽃길 등 발로 찾아간 지역의 모습을 소개한다. 동백상회, 양정 호박꽃집처럼 소시민들의 공간도 등장한다.

산복도로 야경을 연상시키는 마을 벽에 ‘근면 자주 협동’이라고 써진 모습이 보인다. 청주 수암골 벽화마을이다. 설 작가는 그림 속 일부만 현재 남아 있다고 했다. “이제는 많은 곳이 카페촌으로 바뀌었어요. 개발 이전의 모습을 그려 넣어서 ‘지역의 풍경’에 나만의 이야기를 더하고자 했어요. 그림 속 밤마중을 나온 가족 모습은 1970~80년대 풍경을 재현한 것이죠.”

설종보 '태종대'(1998). 미광화랑 제공 설종보 '태종대'(1998). 미광화랑 제공

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영화에 비유했다. “실제 모습은 일부이고 나머지는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서 화면을 구성하잖아요. 기존에 남은 것을 바탕으로 ‘보존되었으면 하는 풍경’을 재현하는 거죠.” 전시장 한쪽에 1998년에 그린 ‘태종대’ 그림이 있다. 지금은 사라진 예전 등대 모습과 커플룩을 입은 신혼부부 모습을 보면 ‘예전에는 이랬지’ 생각하게 된다.

설종보 '명옥헌'. 미광화랑 제공 설종보 '명옥헌'. 미광화랑 제공

담양 명옥헌을 그린 작품은 위에서 내려다 보는 시점과 정면에서 보는 시점이 섞여 있다. “동양화 풍으로 배경을 죽이고 두 시점을 섞었어요. 숨바꼭질에서 술래 역을 하는 아이는 보이는데 친구는 안 보이죠? 나무 뒤에 숨겨서 상상력을 더했어요.” 작가는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그림은 소설의 액자식 구성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다.

“처음 여행을 다닐 때는 그대로 그려도 됐는데 점점 없어지는 것이 많아져요. 그래서 이제는 조금 남은 것을 바탕으로 해서 ‘보존되었으면 하는 것’ ‘사라져 버린 본래의 모습’ 등을 그리고 있어요. 상상력을 동원해서 사라진 원형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요.”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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