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난초·김소희·한영숙…명인명창 15인에 대한 역사적 기록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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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와 춤을 살았더라/유익서

<소리와 춤을 살았더라>. 열화당 제공 <소리와 춤을 살았더라>. 열화당 제공

<소리와 춤을 살았더라>는 ‘유익서가 만난 십오 인의 명인명창’이다. 소설가 유익서는 1984~1988년, 그러니까 39~43세 때 <월간동아>에 기획 ‘명인명창을 찾아서’를 연재했다. 문화부 장관을 지낸 배우 김명곤과 함께 격월로 글을 썼는데 당시 담당 기자가 정찬 소설가였다고 한다. 그때 쓴 14편에다가 다른 지면에 김소희 명창에 대해 쓴 글 1편을 더한 총 15편을 이번 책에 묶었다.

이 책은 15명의 명인명창에 대한 역사적 기록인 셈이다. 그분들 모두 다 작고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술은 뭔지, 삶은 뭔지를 가늠케 한다. 가야금산조 김난초(1911~1989)는 가야금산조의 중시조 김창조의 손녀였다. 배운 적 없고 듣기만 했던 할아버지 가락이 몸속에 저절로 흐르고 있어 가야금으로 나아간 예다. “열두 현에다 마음을 자유자재로 뿌렸다가 모았다가 하며 아로새겨 갈 때 비로소 심오한 맛, 법열 같은 삼매경에 빠져들 수 있어.” ‘마음을 흔드는 힘’은 손재주가 아니라 그것을 살아야지 가능하다는 것이 김난초의 말이다. 과연 예술은 산다는 것이다.

김소희(1917~1995)의 판소리에는 ‘희다가 겨운 백자의 옥빛’이 어려 있다고 한다. 서정주가 그렇게 칭찬했다. 그의 소리 인생에 희로애락이 깃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불화로 아버지는 타향으로 떠돌고, 결국 어머니마저 친정으로 가버려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김소희는 언니 집에 얹혀살 때 명창 이화중선의 소리를 듣고 바로 꽂혔다고 한다. 알지 못할 서러움이 소리에, 잠자고 먹는 시간을 빼고 죽기 살기로 매달리게 했단다. “한이 이끼처럼 끼지 않고서는 목구성이라 할 수 없어요.”

승무의 한영숙(1920~1989)도 춤을 혼이고 넋이고 마음이라고 말한다. ‘춤사위는 뼈 마디마디에서 사무치게 우러나와야 한다’는 것이 그에게 춤을 전수한 할아버지의 가르침이며 그의 평생 신조라고 한다. 뭇 예술, 뭇 행위, 뭇 삶이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영숙도 어릴 적 평범하지 않은 출생과 가정환경 때문에 이쪽저쪽을 헤매다니며 보통학교 3학년 때 학업을 중단하고 할아버지에게 맡겨졌는데 그 할아버지가 남도춤의 천재인 한성준이었다.

고성농요의 유영례(1923~2007)는 노동요 명인이다. 꿋꿋하고 구슬프면서 사뭇 서늘한 노래다. 청승맞다는 지청구를 듣는데 “일을 하면서 겨울밤을 샐 때 이런 노래가 아니면 어떻게 이겨내겠느냐”는 것이다. 17세 때 결혼했으나 남편과 사별하고 35세 때 개가했는데 그때 새로 만난 남편 최규칠(1904~1987)이 인생의 새 전기가 됐다. 최규칠은 고성 바닥의 알아주는 멋쟁이, 고성오광대 예능보유자였다.

대금정악 김성진(1916~1996), 가곡 홍원기(1922~1997), 가사 정경태(1916~2003), 서도소리 오복녀(1913~2001), 선소리산타령 정득만(1907~1992), 범패 박송암(1915~2000), 강령탈춤 박동신(1909~1992), 하회별신굿탈놀이 이창희(1913~1996), 통영오광대 이기숙(1922~2008), 임실필봉농악 양순용(1941~1995),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안사인(1928~1990) 등의 인간문화재들의 삶과 예술이 기록돼 있다.

유익서 소설가는 “음악은 사용하는 언어의 억양, 자연환경, 살아가는 풍습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것”이라며 “음악은 만국 공통어와 같은 생득적인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혀야만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배워 50년 가까이 전통음악을 옆구리에 차고 살며 <새남소리>(판소리) <민꽃소리>(대금) 등 작품을 써왔다고 한다. 유익서 지음/열화당/256쪽/1만 7000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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