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의 생각의 빛] 살아있음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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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우리 사회 휩쓰는 ‘우울’이라는 유령
자살·고독사, 무감한 뉴스거리 전락
생의 자각으로부터 희망의 빛 찾아야

몇 년 전 총장 직선제를 외치며 대학 본관 난간에서 투신해 스스로 생명을 거둔 어느 교수에 관한 이야기를 최근 지인과 나눈 적이 있다. 많은 이들에게 안타까움을 안긴 사건이기도 했지만, 필자와도 특별한 인연이었던 분이라 더러 그분을 입에 올리면 아직도 마음에 그늘이 짙게 드리우곤 한다. 지인은 그분이 극단적인 선택 직전에 울린 휴대폰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설정한 엄정한 계획을 되돌리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 상황을 상상하고는 몸서리쳤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맞닥뜨린 한 실존의 고뇌는 아무리 상상한들 체감하기 힘들다. 그 상황은 상식적이거나 평범한 수준에서 택하거나 물릴 수 있는 선택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은 수많은 선택지를 놓고 하나를 고르는 것과 같다. ‘이것 아니면 저것’의 행동과 사고 원리가 알게 모르게 작동한다. 늘 최상의 선택을 하게 되면 두말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어떨 때는 최악과 차악을 두고 선택해야만 하는 경우도 생긴다. 신은 공평하게도 어느 한쪽에 몰락을 선사하면, 또 다른 쪽에서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행운을 가져다주곤 한다. 한 사람이 울고 또 다른 한 사람이 웃는다. 한 사람의 감정에도 수많은 스펙트럼이 펼쳐져 있어서 금방이라도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모르더라도 어느샌가 설움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다른 이들의 눈물과 절망에 위로를 보내다가도, 위태위태한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곤 한숨을 쉬기도 한다. 요즘 여기저기서 보도되는 ‘고독사’는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그야말로 ‘뉴스거리’였지만, 어느새 남 일처럼 여기기엔 여간 불안하지 않은 ‘불편하지만 가까운 친구’가 되어 버렸다.


‘극단의 선택’을 감행하는 숱한 이들의 마음에 자리 잡은 고독감은 섣불리 진단할 수도 없고, 짐작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따져 물을 자격이 우리에게 있을지 과연 의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을 거듭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우리는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와 비례해서 스스로 되돌릴 수 없는 쓸쓸한 결단을 감행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울함에 빠진 현대인의 초상을 역력히 본다. 우울은 본디 무기력이나 권태와 연결되어 있다. 자신의 주위에 펼쳐져 있는 사물과 사건을 자신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우울’이라는 독이 든 항아리에 빠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듯 ‘우울’이라는 유령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다. 한 사람의 우울뿐만 아니라, 집단이나 공동체에 전염된 우울 말이다. 한때 각종 추억팔이 상품이나 새 천 년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돌림병처럼 사회를 휩쓸었다면, 지금은 권태나 무력감을 동반한 우울함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바람’으로 자리 잡았다. 학교폭력 피해자로 알려진 유명한 유튜버의 자살을 비롯하여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극단적인 선택에 따른 사회적인 파장은 이제 익숙해져 버린 ‘소문’으로 떠돈다. 이는 그 중요성이나 충격의 감도가 저하된 현실과 연관이 깊다.

이런 사태를 가져오게 한 요인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정치적 국외자(局外者)’가 아닐까. 한때 논란이 되었던 정치적 허무주의가 변혁이 실현되기 힘든 사회체제에 대한 피로감의 표출이었다면, 정치적 국외자는 정치나 정책의 파장에서 자신은 소외되었거나 벗어나 있는 존재로 인식할 때 생겨나는 의식의 질병과 관계 깊다. 정책 내용보다는 어느 누가 당선이 되든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나 구역의 지가(地價)만 올려줄 후보를 찍는 사람도 넓게 보면 그러한 국외자에 포함된다. 오로지 자신의 물질적인 재화의 증대 따위에만 골몰하거나, 아니면 모든 국면에서 자신을 배제해 버리는 데서 생겨나는 ‘뇌피셜(희박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도를 넘은 자기 추측이나 주장)’에 생각을 집중하는 사람들에게서 우울함은 언제라도 달라붙는다.

30년이 넘은 망명 생활과 15년간이나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74세 때 대작 〈희망의 원리〉를 펴냈다. 방대한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책의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순간에도 희망의 가능성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가능성은 개연성이고, 긍정적인 개연성은 순간적인 그릇된 판단을 다시 신중히 재고할 희망의 원리다. 거기서부터 삶의 새로운 발견이 시작된다. 그러니 살아있다는 자각이야말로 기적이 아니겠는가. 이 세상은 기적으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 이 마음으로 불안과 절망에 사로잡힌 자신을 들여다볼 때 가능성의 빛은 희미하게 깜박일 것이다. 그러니 언제든 살아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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