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여치 소리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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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숲길에서 흔히 들렸던 풀벌레 소리! “치치치, 칙, 치익치익, 치이익.” 전기합선 때 나는 소리가 나다가 갑자기 부드럽고 경쾌한 소리로 바뀐다. “찌르르, 찌르르르.” 귀뚜라미 소리와는 확연히 다르다. 바로 ‘풀밭의 연주자’ 여치가 내는 소리다. 여치는 상황에 따라 소리를 달리 낸다. 그 이유에 대해선 10여 년 전 국립생물자원관이 밝힌 바 있다. 여치는 주로 수컷이 날개를 비벼 소리를 내는데, ‘치치치’는 암컷을 유인하기 위해, ‘찌르르’는 다가온 암컷에게 짝짓기를 요구하기 위해 내는 소리라고 한다.

사람 귀에 여치 소리는 여느 곤충 소리에 비해 유달리 친숙하게 들린다. 까닭이 있다. 여치 귀는 다리에 있고 크기도 1mm 미만이지만, 구조가 사람 귀를 빼닮았다. 사람 귀는 크게 고막·귓속뼈·달팽이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치 귀도 이와 비슷하다. 여하튼 여치는 자기 귀에 편한 소리를 내는 법이고, 그 소리는 여치 귀와 닮은 사람 귀에도 편하게 느껴진다. 옛사람들은 보릿대로 만든 벌레통 안에 여치를 키웠다고 하는데, 여치가 내는 그 좋은 소리를 상시로 듣기 위함이었을 테다.

그런데 여치 소리가 실제로 사람의 우울감을 낮춰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갖게 만드는 것으로 확인됐다. 원광대 연구팀이 최근 이를 임상 실험을 통해 증명했는데, 노인들에게 여치 소리를 들려준 결과 우울증은 23%, 스트레스는 24%, 불안감은 18% 줄어드는 효과를 보였다고 한다. 해당 연구팀은 올해 1월에는 여치 소리를 활용해 초등학생들의 정서를 치유한 연구결과를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요컨대 여치 소리가 사람의 지치고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 준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셈이다.

우스개로 하는 말이지만, 여치는 막걸리를 좋아한다. 십수 년 전 충북 농가에 여치가 떼로 덮쳐 피해가 컸는데, 막걸리 담긴 페트병 덫을 놓아 탁월한 효과를 거둔 일이 당시 화제가 됐다. 피해 농민들은 설탕물이나 과일 주스로도 여치 떼를 유인했지만 유독 막걸리 덫에만 여치가 들어갔다고 한다. 여치가 나는 모습도 날렵한 베짱이와 달리 투박한 게 막걸리에 취한 촌로가 뒤뚱이는 듯 위태롭다. 막걸리 좋아하는 이 치고 악한 심보 없다는데, 그리 생각하니 여치에게 정이 도탑게 간다. 아쉽게도 이젠 시골에서도 여치 소리를 듣기 어렵다. 오염된 공기에 농약까지 마구잡이로 뿌려댄 탓이리라. 세상사로 이래저래 심란한 요즘인데, 여치 없는 가을이라 더 그런가 싶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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