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알라르간도, 천천히 더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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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지난 5일까지 부산 전포동 놀이마루에서 열린 미디어 전시 '알라르간도'의 한 장면. 남영희 제공 지난 5일까지 부산 전포동 놀이마루에서 열린 미디어 전시 '알라르간도'의 한 장면. 남영희 제공

불편한 전시였다. 전시장은 캄캄하고 텅 비어 있었다. 하릴없이 암흑 속에 선 채로 바닥을 응시하고 있노라니 빛으로 구현한 이미지들이 펼쳐졌다. 검푸른 하늘 구름 속에 서 있는 듯 느꼈을 때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조국 어딘가에서 아이들이 죽어가는 이 순간, 난 춤을 출 수 없어!” 인문미디어 예술단체 안락의 미디어 전시 ‘알라르간도’의 한 장면이다. 메시지에 따라 변하는 빛의 이미지는 불안하고도 막막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디지털 인터랙티브 설치 프로젝트인 이 전시는 우크라이나 청소년들과 충렬고 학생들의 목소리를 전시했다.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서로 다른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영국에서 난민으로 살고 있는 마리아는 댄서 경력이 9년인데도 차마 춤을 출 수가 없다. 유리는 여러 나라를 전전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참전 중인 아버지와 러시아에 남은 가족들 걱정에 쉽게 잠들지 못한다. 알리나는 낯선 땅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것만 같은 극도의 상실감에 시달린다. 이들의 목소리에 입시전쟁이라는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 한국 청소년들이 답한다. 충렬고 박태림은 시험을 치를 때마다 자기와의 싸움이 힘겹다. 수능을 향해 이윤성이 내딛는 발걸음도 더디고 무겁다.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렸던 정재민은 번아웃을 겪기도 했다. 배우를 꿈꾸는 박재성은 줄세우기식 평가제도에 좌절을 경험했다.

모든 전쟁에는 적이 있다. 물리쳐야 할 존재다. 선과 악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며, 살인과 폭력마저도 곧잘 정당화된다. 삶이라는 전장도 무엇이 다를까. 입시전쟁에서 친구를 딛고 일어서야 자신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무력 충돌에 참혹한 희생이 뒤따랐던 것처럼, 경쟁 과정에서 삶의 소중한 가치들이 희생되거나 보류될 수밖에 없다. 수능일 아침, 온 나라의 일상이 셧다운되는 진풍경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명문대 진학을 ‘멋진 인생’의 출발점으로 여기는 우리 시대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지금, 우크라이나 청소년과 한국 청소년은 삶의 어느 지점을 건너가고 있을까. “행복과 기쁨의 감정들을 느끼는 것을 멈추었어. 나는 지금 그저 하루만 살고 있어.” 삶이 여전히 회색이라 말하는 마리아가 멈추었던 감정을 회복할 날은 과연 언제일까. 정재민에게 현재란 미래보다 뜨거운 단어다. 먼 미래의 불확실성에 매몰되지 않고, 지금 여기의 고단한 삶의 자리에서 길어 올린 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형형색색의 빛이 사라져 버린 공간에 어느새 디지털 나비가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목소리로 들려준 이들의 삶에 귀를 기울이던 관객들이 내남없이 성큼 다가가 나비 떼를 날렸다. 움츠린 삶이 나비처럼 날아올랐다. 천천히 그리고 더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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