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이기적’ 헌혈

김마선 기자 ms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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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선 페이퍼랩 본부장

생명을 나누는 숭고한 헌혈
부산에서 한해 20만 명 참여

헌혈 60% 10~20대가 차지
인구 감소로 헌혈량도 부족

새해에도 삶 팍팍할 것 예상
주위 살피는 공생 자세 필요

지난달 20일 점심시간에 짬을 내 부산 남포동 헌혈의집에 들렀다. 직원을 통해 안 사실인데, 2001년을 마지막으로 무려 22년 만의 헌혈이었다. 그동안 대체 뭘 하고 살았던가. 헌혈대에 누워 반성과 함께 잡다한 생각을 좀 했다.

컴퓨터로 문진 받고, 혈압 재고, 실제 피 뽑는 데 30분 남짓 걸렸다. 마치고 나오는 나의 손에 문화상품권 2장(선택), 과자, 음료수가 쥐어졌다. 근무자들의 밝은 모습과, 뭔가 좋은 일을 했다는 뿌듯함은 덤이었다. 며칠 뒤 헌혈 앱 ‘레드커넥트’에서 건강에 별 이상이 없다는 ‘의외’의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헌혈은 수혈자를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나누는 숭고한 행위이며, 수혈이 필요한 환자들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혈액제제를 얻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의 헌혈 독려 글이다.

솔직히 22년 만의 헌혈은 이런 숭고한 취지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를테면 ‘이기적 동기’랄까. 지난해 11월 병원에서 고혈압 진단을 받았다. 약 대신 생활습관을 바꾸는 중에 헌혈을 하면 혈압이 좀 떨어지지 않을까 얄팍하게 머리를 굴린 것이었다. 마침 인터넷 검색 결과도 등을 떠밀었다. 지속적인 헌혈이 10~20mmHg 정도의 혈압을 낮춘다는 게 아닌가.

물론 그 전에 헌혈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텅 빈 헌혈의집 혈액보관고나 헌혈 하는 사진을 신문에서 볼 때면 그랬다.

대한적십자사 부산혈액원에 따르면 2023년 한 해 부산에서 약 20만 명이 헌혈을 했다. 지난달 말 기준으로 6일치를 보유 중인데 보통 5일치 미만으로 떨어지면 비상이다. 혈액형별로 보면 수요가 많은 O형과 A형의 경우 3.5일과 4.5일치에 그쳐 부족한 상황이란다.

저출생·고령화는 헌혈에도 그림자를 드리운다. 헌혈은 16~69세에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10~20대가 가장 많이 한다. 이들이 전체의 60%를 차지한다. 또 처음 헌혈을 하는 이의 절반이 고교생이다. 주로 학교를 방문한 헌혈버스를 통해서다. 부산은 합계출산율이 전국 꼴찌 수준인 데다 청년 유출까지 심각하다.

피는 인공적으로 만들거나 다른 물질로 대체할 수 없다. 대한적십자사가 응급상황에 대비해 노심초사하는 이유다. 헌혈된 피는 혈액정보공유시스템을 통해 의료기관에 공급된다. 수혈 비용 일부는 건강보험에서 지원하고 나머지는 본인이 부담하는데, 헌혈증서 1장이면 본인 부담 없이 1팩을 수혈받을 수 있다.

혈액관리법상 매혈(賣血)은 금지돼 있다. 그런데 피가 부족하다는 뉴스를 볼 때면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만약 개인이 피를 팔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지 않던가.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피 공급은 늘겠지만 온갖 사회적 병리현상이 빚어질 게 뻔하다. 헌혈을 ‘이타적’ 영역으로 두는 것은 어쩌면 인간 존엄을 지키기 위한 설정이 아닐까 싶다.

몇 년 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었을 때 생명의 이치에 대한 경이로움과 씁쓸함이 교차했다. 오로지 생존과 번식을 위해 애쓰는 이기적인 유전자가 인간을 ‘숙주’로 삼고 있다는 것이 요지다. 인간의 이기심에 기초한 ‘시장’이라는 것도 실은 유전자가 ‘보이지 않은 손’으로 조작하는 것이려나?

정반대로 미국의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인간의 이타성에 주목했다. 한 학생이 인류 문명의 증거가 무엇이냐고 묻자,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1만 5000년 전 인간 대퇴골을 꼽았다. 이 뼈가 다시 붙으려면 약 6주가 걸리는데 누군가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 굶어 죽거나 맹수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본질적으로 생명은 이기적이고, 사회는 ‘자기 향상’의 유인 체계로써 그 이기심을 장려한다. 하지만 사회는 또 주위 눈치, 도덕, 법 등을 통해 이기심을 제어하면서 공생을 도모한다. 인간 행동은 이기심과 이타심이 혼재된 경우가 대부분이고,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利害)가 ‘너와 나’로 딱 구별되지도 않는다.

새해가 밝았다. 무심한 자연에 인위적으로 마디 지은 게 시간일 테지만 반성과 희망의 계기로 삼기에 좋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삶이 팍팍할 것 같다. 행여 ‘뼈가 부러진’ 이웃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자. 인공지능(AI)과 인간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는 시대, ‘인간 연대’의 경건한 의식으로써 헌혈 동참도 의미 있겠다. 그게 여러모로 각자에게도 이로울 테고.

그나저나 헌혈을 하면 과연 혈압이 떨어질까. 아쉽게도 대한적십자사 부산혈액원 설명은 좀 달랐다. “헌혈이 혈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의학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는 공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무튼 기분은 상쾌했다.


김마선 기자 ms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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