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댐퍼보이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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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타이베이의 랜드마크 건축물이 2004년 세워진 타이베이101이다. 높이가 무려 509m다. 그런데 이 초고층 건물이 건축계에서 ‘내진 설계의 상징’으로 일컬어진다. 어지간한 지진은 이 건물에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다. 바로 댐퍼라는 장치 덕분이다. 댐퍼는 건물이 흔들려도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일종의 진자 역할을 하는 거대한 추다. 타이베이101의 댐퍼는 윈드댐퍼 또는 댐퍼보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댐퍼보이 이후 세계 각국의 초고층 건물엔 댐퍼 장치가 속속 설치돼 왔다.

타이베이101에 댐퍼보이가 적용된 건 1999년 9월 21일 대만에 닥친 이른바 ‘921 대지진’ 때문이다. 규모 7.7의 당시 지진으로 사망자만 2400여 명에 이르는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지진의 규모도 규모지만, 결국은 인재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1980년대 이후 대만에 부동산 열풍이 불면서 부실공사가 만연했고, 그 뒷배로 부패한 정치인과 관료가 있었다. 비난 여론에 드세지면서 결국 2000년 총통 선거에서 국민당 독주체제가 무너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후 대만 정부는 지진 관련 범국가적 대응체계를 수립했다. 컨트롤타워 부처를 신설하고 건축법규를 최대한 강화했다. 신축 건물은 물론 기존 건물의 내진 설계 기준도 지속적으로 높였다. 타이베이101의 댐퍼보이는 그런 배경 하에 도입된 것이고, 뼈를 깎는 노력 덕분에 현재 대만의 지진 대비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지난 3일 규모 7.2의 강진이 발생한 뒤 여진이 계속되고 있는 대만에 세계가 새삼 놀라고 있다. 7.2는 대만 지진으로는 ‘921 대지진’ 이후 최대 규모로, 원자폭탄 32개가 한꺼번에 터질 때와 맞먹는 파괴력을 가진다고 한다. 그런데, 속단하긴 이르지만, 사망자가 10여 명에 불과하다. 25년 전과는 천양지차다. 참고로, 단순 비교가 어렵다고는 하나, 2023년 9월 모로코에서 발생한 규모 6.8의 강진 때는 2100여 명이 숨졌다.

한반도에서도 최대 7.0 규모의 지진이 발생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2015년 정부가 발간한 ‘지진 피해 예측 모델’에 이미 “규모 7.0 지진이 발생하면 수백만 명의 인명 피해와 수천조 원의 경제 손실이 발생한다”고 언급돼 있다. 예측 후 9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정부가 충분히 대비했으리라. 우리 정부가 대만 정부보다 못한 게 없을 테니 그렇게 믿으려 한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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