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 씹어먹기 ‘오도독’] 싸울 땐 싸우더라도, 밥은 먹고 합시다

탁경륜 기자 ta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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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애니메이션 ‘던전밥’
던전에서 요리하는 모험가들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한 메시지

애니메이션 '던전밥'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애니메이션 '던전밥'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엘프, 드워프, 드래곤… 이 이름을 듣고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면 당신은 판타지물에 친숙한 사람이다. 그럼 이건 어떨까. 크라켄 양념구이, 드래곤 꼬리 수프, 드래곤 스테이크. 이건 좀 낯설다면 지금 소개할 애니메이션 한 편을 주목하자.

넷플릭스가 제공 중인 ‘던전밥’은 일본 작가 쿠이 료코가 그린 만화를 원작으로 한 24부작 애니메이션이다. 기존 판타지물이 던전에서 모험을 하는 일행의 여정에 주목했다면, 이 작품은 던전에서의 일상을 그려낸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무엇을 먹는지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다.

‘던전밥’은 패배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레드 드래곤과 혈투를 벌이던 주인공 라이오스는 동생의 희생 덕에 겨우 던전을 빠져나온다. 그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다시 던전으로 향한다. 마치 뻔한 판타지물의 도입부 같지만 ‘던전밥’은 보기 좋게 예상을 피해간다.

이 작품은 성장을 추구하는 주인공의 뼈를 깎는 수련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시청자를 들뜨게 하는 변신이나 각성 같은 것도 없다. 그저 던전을 탐험하고 그곳에서 출몰하는 마물(마법생물)을 어떻게 요리할지 고민하는 일행의 모습을 보여준다. 에피소드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음식이 등장하고, ‘미스터 초밥왕’처럼 구체적인 조리법도 담긴다. 라이오스 일행은 생사가 오가는 던전에서도, 잘 차려진 ‘마물 한 끼’에 행복을 느낀다.

단순히 음식 이야기만 하는 애니메이션은 아니다. 쿠이 료코 작가는 요리를 소재로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점차 바뀌는 등장인물의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작품에서 가장 독특한 캐릭터는 센시다. 드워프인 센시는 10년간 던전에서 마물 요리법만 연구한 ‘달인’이다. 드래곤과의 결투를 앞둔 상황에서도 빵을 굽는 게 우선일 정도로 먹는 것에 관심이 많다. 그는 왜 이렇게 음식에 열광할까. 그에게 음식은 단순히 미식의 영역이 아니라 삶 그 자체다. 그는 요리법을 연구하며 마물의 생태계를 배웠고, 그들과 공존해야만 자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연의 흐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는 게 그의 철칙이 된 이유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일상화된 던전에서 사는 등장인물들은 센시의 요리 과정을 지켜보며 화합과 공존을 떠올린다. 이제 그들에게는 공격보다 공존이 우선이다. 마법으로 마물을 소멸시키던 엘프는 그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고민한다. 인간을 살해하던 오크도 인간과 함께 빵을 구워 먹는다. “왜 그렇게 놀라나. 원래 생물 곁엔 기생충이 함께하는 법” 센시의 한 마디가 작품을 관통한다.

작품의 메시지가 통했을까. 2016년 일본 만화대상에서 2위를 차지한 이 작품은 최근 국내 SNS에서 입소문을 탄다. SNS에서는 던전밥과 콜라보한 일본의 카페에 다녀왔다는 후기가 줄을 잇는다. 지난달에는 팬들의 인기에 힘입어 애니메이션 2기 제작이 결정되기도 했다. 이슬아 작가는 최근 이 작품을 보고 “살려는 힘과 살리려는 힘이 우리의 본능”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한동안 남을 무찌르는 것에만 집중하고, 살리는 법에는 무관심했는지 모른다. 정치가 실종됐다는 비판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던전에서도 밥을 먹는데, 싸울 땐 싸우더라도 함께 밥은 먹자.


탁경륜 기자 ta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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