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애정남’이 필요한 한국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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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 공모 칼럼니스트

대통령 임기 2년간 거부권만 14회
야당은 위원장 독식, 탄핵 밥 먹듯
관례 짓밟히고 강 대 강 대치만 남아

모든 걸 법으로 정하는 건 불가능
우리 사회 직면한 문제 손도 못 대
정치적 컨센서스 회복이 절실하다

과거 KBS 개그콘서트에 ‘애정남’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애정남’은 ‘애매한 것을 정해 주는 남자’의 줄임말.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고민하지만 쉽게 결론 내지 못하는 문제들에 대해 ‘애정남’이 명쾌한 해답을 내려 주는 코너였다. 예를 들면 지하철에서 할머니와 임산부가 동시에 서 있을 때 누구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지, 연인과 헤어진 이후 보통 어느 정도 연애 금지 기간을 가져야 하는지 등의 문제들이 있었다. “지하철 자리는 일단 할머니에게 양보하지만 5개월 이상의 임산부라면 임산부에게 양보해야 한다”든가 “전 연인과 1년 사귀었다면 한 달, 2년 사귀었다면 두 달이 연애 금지 기간이다”라던 ‘애정남’의 해법은 그게 꼭 정답이 아니어도 우리에게 공감에서 오는 쾌감을 선사했다.

우리가 일상에서 종종 애매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건 세상이 칼로 두부모 자르듯 정확히 재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마다 놓인 처지와 가치판단의 기준이 다른 만큼 모든 일에 정답이 있을 순 없다.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키면 애매한 문제들에 답을 내리는 건 더욱 어려워진다. 법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법이란 건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일상의 모든 영역을 법이 통제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독일의 법학자 게오르크 옐리네크가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사람들은 법으로 규정할 수 없는 일상의 애매한 빈틈을 사회적 합의로 메웠다. 우리가 살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해 온 매너와 관행들이 그렇다. 뒤따라오는 사람을 위해 출입문을 잡아 준다든지, 노약자에게 앉을 자리를 양보한다든지 하는 매너와 관행들은 비록 법에 없지만 우리는 지키려 노력한다. 그렇게 하는 게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이롭기 때문이다. 이건 인류가 오랜 세월 살아오며 쌓아 올린 지혜이기도 하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모든 변수를 일일이 법과 시행령에 담을 순 없다. 상임위원회 위원장 배분은 몇 대 몇으로 할 것이며, 정부 정책을 야당이 반대할 땐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 시기마다, 현안마다 달라지는 이 모든 상황을 법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앞선 시대의 정치인들은 그 빈틈을 합의, 즉 정치적 컨센서스를 형성해 보완했다. 컨센서스의 사전적 의미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의견에 대한 합의 또는 그 의견’이다. 쉽게 말해 ‘대체로 동의하고 존중해 온 관행’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컨센서스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절제다. 우리 헌법은 국회가 통과시킨 법안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재의요구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그 거부권이라는 건 대대로 ‘핵 단추’처럼 여겨졌다. 눌렀다간 파멸을 맞이하는. 그래서 민주화 이후 대통령들은 대체로 거부권 행사에 신중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7건, 노무현 전 대통령이 6건(2건은 탄핵 소추 당시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이 행사)이었고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은 각각 2건, 1건에 불과했다. 김영삼·김대중·문재인 전 대통령은 단 한 번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임기 2년 만에 거부권을 14회나 행사했다.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처럼 야당의 동의 없는 인사 감행은 예사다. 대통령실은 말한다. 헌법에 보장된 대통령의 권한이라고.

반대편에 있는 야당도 ‘법에 명시된 권한’만 되뇐다. 국회는 그동안 다수당과 제2당이 국회의장과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을 나눠 가져왔다. 다수에 의한 횡포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총선에 이어 이번에도 법적으로 문제없다는 이유로 이 모든 걸 독식했다. 탄핵도 그렇다. 과거 야당 정치인들은 탄핵을 매우 신중하고 예민하게 다뤘다. 이제는 대통령이고 장관이고 검사고 상관없이 밥 먹듯이 탄핵을 말한다. 폭주하는 야당에 어느 정도 인사가 ‘부적절한 후보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위법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법에 주어진 권한을 행사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정치의 위기는 정치적 컨센서스의 파기에 있다. 그동안의 관례가 짓밟히고 합의가 사라진 자리에는 강 대 강 대치만 남았다. 양쪽 다 “법대로”를 외친다. 국회는 걸핏하면 교착 상태에 빠진다. 그 결과 법에 없거나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은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양극화, 인구 감소, 지역 소멸 등 우리 사회가 직면한 심각한 위기들은 정작 뭐 하나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뒷전으로 밀린다. 이젠 ‘국회는 지역 소멸 해결을 위해 어떻게 상임위를 구성해 대화를 진행하고 몇 날 며칠까지 합의안을 도출해야 한다’라는 문제까지 법으로 규정해야 할 판이다. 구성원 간 신뢰가 사라져 모든 걸 법대로 풀어야 하는 시대. 지금의 한국 정치야말로 ‘애정남’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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