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수도 부산, 한국 서화 거장을 키웠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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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한남 <건축가의 서재> 출간
건축가 김원 서화 컬렉션 소개
서화 작품 속 사연 보따리 풀어
“한국 서화 가치 몰라 안타까워”

내고 박생광이 그리고 유당 정현복이 화제를 쓴 화조도. 태학사 제공 내고 박생광이 그리고 유당 정현복이 화제를 쓴 화조도. 태학사 제공

부산 출신 원로 건축가 김원은 자연에 녹아드는 우리 옛집의 건축철학을 현대에 적용해 한국을 대표하는 환경주의 건축가로 꼽힌다. 독립기념관·코엑스 등을 설계했고, 일본에서 발간한 <세계의 현대건축가 101인>(1985)에 선정되기도 했다.

80대의 원로 건축가 김원은 한편으로 우리 서화와 전각, 현판, 고문서 등을 모으는 컬렉터로도 유명하다. 2년 전 김원 건축가가 소장한 전각 작품을 소개한 책 <전각, 세상을 담다>(석한남 지음·광장)는 화제가 되기도 했다. 도장 정도로만 알던 전각이 얼마나 아름다운 예술품인지 새롭게 상기시켰다. 전각에 이어 최근 출간한 <건축가의 서재>(석한남 지음·태학사)는 김 건축가의 컬렉션 중 전통 그림과 글씨에 깃든 사연과 가치를 소개하고 있다.

김 건축가는 자신의 예술적 영감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고서화와 전각에서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인조차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 아닌가 싶어 고문헌 연구가 석한남 씨를 찾아가 책을 만들어 알려달라 청했다. 특히 부산에 살았던 김 건축가는 부모님이 부산에 피난 온 예술가들을 적극 후원하며 작품이 자연스럽게 집에 오게 된 사실에 주목했다. 이 책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서화 대가들의 부산 시절 이야기를 전하며 부산이 그들의 예술이 꽃피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증언하고 있다.

고위 공무원으로 6·25 전쟁 떄 순직한 김 건축가의 아버지는 우리 민족의 문화를 사랑했던 고미술 애호가였다. 일본에서 유학한 신여성인 김원의 어머니는 부산에서 지인들과 ‘병풍계’를 만들고, 돌아가면서 부산에 머문 예술가의 병풍을 구입하게 해 생계가 힘들었던 예술가들을 적극 후원했다. 김 건축가의 부산 집에는 작품을 팔기 위해 찾아온 예술가들로 항상 붐볐다.

김 건축가는 책에서 “그때 청남 오제봉, 운전 허민, 청사 안광석, 의재 허백련과 그의 동생 목재 허행면, 내고 박생광, 유당 정현복, 정재 최우석 등 쟁쟁한 분들이 우리 집에 자주 오셨다”고 소개했다. 책은 이들 예술가와 연결된 사연, 그들이 직접 전한 작품과 작품 속 메시지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청남 오제봉의 글씨. 태학사 제공 청남 오제봉의 글씨. 태학사 제공
효당 최범술의 글씨. 태학사 제공 효당 최범술의 글씨. 태학사 제공

한국의 차문화를 집대성했다고 불리는 효당 최범술은 만해 한용운을 모시며 경남 사천 다솔사로 출가했다. 다솔사 근처 진주 의곡사에는 청남 오제봉이 20여 년 주지로 있었고 청사 안광석은 부산 범어사에서 출가했다. 이들의 글씨는 지금도 절의 여러 곳에 남아 있다. 1950년대 초반, 환속한 청남 오제봉을 비롯해 소정 변관식, 내고 박생광, 유당 정현복, 운전 허민 등은 효당이 내어준 차에 위로를 받았고, 의기투합해 부산 광복동 남포동 등지로 자주 내달렸다고 한다.


현재 심사정의 산수화. 태학사 제공 현재 심사정의 산수화. 태학사 제공

추사 김정희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노근란. 태학사 제공 추사 김정희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노근란. 태학사 제공

이 책에는 겸재 정선과 함께 ‘겸현(謙玄) 이재(二齋)’로 불린 조선 후기 화가 현재 심사정의 산수화를 필두로, 남종문인화의 거장 의재 허백련의 산수화, 채색화의 거장 내고 박생광이 그림을 그리고 진주 촉석루 현판으로 유명한 유당 정현복이 글씨를 쓴 화조도, 한국 현대 동양화의 거장 남정 박노수의 산수화, 허백련을 이은 남종문인화의 대가 아산 조방원의 산수화 8폭 병풍 등 당대를 풍미했던 기라성 같은 화가들의 그림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추사 김정희의 ‘산거추명’ 행초서 8폭 병풍을 비롯해, 역매 오경석과 위창 오세창 부자의 서예 글씨, 전각과 서예로 이름을 떨친 청사 안광석의 글씨와 전각, 한국 현대 서예의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강암 송성용의 선면 글씨까지 다양한 시대의 뛰어난 서예 작품들이 들어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진주 촉석루 현판을 쓴 유당 정현복과 김 건축가 어머니의 인연은 유당의 아들이자 세계적인 서예가로 인정받는 유당의 아들 정도준과 김 건축가로 대를 이어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번 책 <건축가의 서재>는 거장 서예가 정도준이 직접 제목 글씨를 썼다.


책 ‘건축가의 서재’ 표지. 세계적인 서예가 정도준이 제목 글자를 썼다. 태학사 제공 책 ‘건축가의 서재’ 표지. 세계적인 서예가 정도준이 제목 글자를 썼다. 태학사 제공

책의 저자인 석한남 씨는 “아파트 쓰레기장에서 우리나라 근대 6대 화가 중 한 분의 작품을 발견한 적이 있다. 현대미술에 밀려 한국 고서화는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오원 장승업의 그림은 지금도 한 폭에 2000~3000만 원선에 그치지만, 오원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세잔 모네 고갱 고흐의 작품은 1000억 원에 팔리고 있다. 이름 있는 근현대 작가의 서예 작품과 한국화조차 표굿값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이다. 서양화만 알리는 우리 화랑의 마케팅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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