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읽기] 조선 시대 서울에 운하 건설이 논의됐다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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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오리까? / 김진섭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임금과 대신들은 어전회의에서 서로 묻고 답하며 치열하게 논쟁했다. 임금은 경연을 통해 덕망이 높은 관리들을 불러 매일 강론을 받았다. 물론 임금도 사람인지라 임금에 따라 크게 달랐다. 세종은 아예 경연청을 창설했지만, 세조는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집현전을 폐지하면서 경연도 없앴다. 연산군은 내시에게 경연에 대리 출석하게 했다. <어찌하오리까?>는 조선 시대 임금과 대신들이 만나 국정을 논의하면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세세하게 풀어냈다.

놀랍게도 그 당시에 운하 건설이 논의된 적이 있었다. 태종을 보좌하며 최고의 권세를 누린 좌정승 하륜은 용산강에서 남대문까지 운하 건설을 위한 토목공사를 하자는 건의문을 올렸다. 용산강은 한강 일대로 지금의 원효대교가 놓인 곳이다. 기술 관료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대신들도 가능하다고 찬성했다. 하지만 많은 인원을 동원한 토목공사로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가 있자, 태종은 하륜의 건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태종은 “우리나라 땅은 모두 모래와 돌이라 물이 머물러 있지 않아 중국 운하를 본받을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당시 풍습을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빼곡하다. 새로 관직에 나가는 신입 관원이 선배 관원을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는 면신(免新)이라는 것이 관례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면신례는 한 번의 신고식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되었고 때론 상납을 요구했다. 율곡 이이도 선배들에게 공손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면신례를 통과하지 못해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임금들이 여러 차례 엄명을 내리지만 면신례는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 역사는 돌고 도는데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것일까. 휴가철을 맞아 조선의 어전회의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도 좋겠다. 김진섭 지음/지성사/272쪽/2만 3000원.

<어찌하오리까?> 표지. <어찌하오리까?> 표지.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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