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루에 앉아 즐기는 독서삼매경이라니…산사에서 만난 '여름낙원'

남태우 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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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시 ‘세계문화유산’ 봉정사

소나무 울창한 숲길 따라 걸어 오르니
사방 뚫린 만세루는 무더위 잊을 낙원
고 엘리자베스 여왕 쌓은 돌탑은 이색

고개 숙이지 않곤 못 들어가는 영산암
소나무·배롱꽃 조화 이룬 훌륭한 중정
시원한 우화루 마루, 나만의 ‘비밀공간’

오래전부터 꼭 가보고 싶은 사찰이었다.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주제로 통도사, 부석사, 법주사, 마곡사, 대흥사와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경북 안동시 봉정사다. 무더운 날씨에 짙은 숲길에서 산책하고 누각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평안하게 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을 굳혔다. 산지 승원이라면 조용한 산중불교 전통을 이어 가는 곳이니 마음을 정화하기에도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살짝 열린 봉정사 진여문 안쪽으로 만세루에 앉아 쉬는 관람객들의 평안한 모습이 보인다. 남태우 기자 살짝 열린 봉정사 진여문 안쪽으로 만세루에 앉아 쉬는 관람객들의 평안한 모습이 보인다. 남태우 기자

■만세루와 여왕의 돌탑

부산에서 2시간 이상 달려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에서 내렸을 때 자동차 온도계가 섭씨 37도를 가리켰다. 봉정사 주차장에 도착하자 매표소 직원이 더운 날씨와 많지 않은 방문객을 감안해서인지 차를 몰고 위로 더 올라가라고 손짓한다.

소나무 숲길 산책을 즐기고 싶다면 이곳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면 된다. 숲길인 데다 거리도 600m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느리게 걸어도 10분이면 도착한다. 걷는 게 싫다면 봉정사 바로 아래까지 차를 몰고 갈 수도 있다. 물론 주말이나 성수기에 사람이 많이 몰리면 차로 올라가는 게 힘들지도 모른다.

한 젊은 부부가 딸과 함께 봉정사로 오르는 숲길을 걷고 있다. 남태우 기자 한 젊은 부부가 딸과 함께 봉정사로 오르는 숲길을 걷고 있다. 남태우 기자

덥지만 유명한 소나무 숲길을 걸을 생각에 그늘에 차를 세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폭염이 온몸을 덮치지만 숲길에 들어서는 순간 사정은 다시 달라진다. 소나무가 얼마나 크고 울창한지 하늘을 거의 가릴 정도다. 당연히 햇빛은 아래로 내려올 생각조차 못 한다. 덕분에 뜨거운 날씨에 아스팔트 도로인데도 그다지 덥다는 느낌은 다가오지 않는다. 젊은 부부와 딸로 보이는 어린이가 앞서서 걸어가는데, 그들도 무더위에 지친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소박한 일주문을 지나 다시 숲길을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봉정사로 들어가는 가파른 계단 길이 보인다. 땀을 흘리기 싫다면 옆으로 돌아가 작은 출입구인 진여문을 이용하면 된다. 문으로 들어가자 여러 사람이 넓은 누각에 앉아 쉬거나 깊은 명상에 잠긴 채 아예 수면을 취하는 특이한 모습이 나타난다. 명색이 사찰인데 이래도 되는 것일까.

사람들이 휴식하는 공간은 만세루다. 위로는 절의 중심인 대웅전을 올려다보고 아래로는 시원한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다. 전후좌우로 막힌 곳이 없다 보니 시원한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온다. 사람들이 마음을 편히 내려놓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중년 남녀가 봉정사 만세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시원한 바람을 즐기고 있다. 남태우 기자 중년 남녀가 봉정사 만세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시원한 바람을 즐기고 있다. 남태우 기자

남들처럼 신발을 벗고 올라가 한쪽 구석에 앉아 등을 기둥에 기대 본다. 엉덩이가 바닥에 닿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책 한두 권만 가지고 가면 이곳에서 하루 종일이라도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몸이 충분히 쉬었다고 느끼는 순간 염불 소리가 들린다. 대웅전에 여러 사람이 앉아 있고 스님이 꼿꼿한 자세로 불경을 낭독한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절에서 염불하는 소리는 왠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느낌을 받는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여러 색깔의 연등이 매달렸다. 절 한쪽 구석에 ‘백중 연등 접수’라는 문구가 보인다. 연등은 하늘을 가리고 마당에 연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엉뚱한 생각이 든다. 형형색색의 연등과 검은색 그림자는 같은 존재의 다른 표현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다른 존재인가.

만세루에 붙은 엉덩이는 떨어질 줄을 모른다. 몸은 시원하고 마음은 편안하니 엉덩이는 심신을 핑계 대면서 여기서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둘러봐야 할 곳은 많이 남았고, 찍어야 할 사진도 적지 않으니 편하게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봉정사 극락전(오른쪽 건물)과 삼층석탑 앞에 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돌을 얹었다는 돌탑이 보인다. 남태우 기자 봉정사 극락전(오른쪽 건물)과 삼층석탑 앞에 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돌을 얹었다는 돌탑이 보인다. 남태우 기자

2022년 세상을 떠난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1999년 봉정사를 방문해 돌탑을 쌓았다는 안내문이 보인다. 그날을 기념해 돌탑을 아직도 허물지 않았다는 것이다. 돌탑의 위치를 찾아가니 극락전 앞이다.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현재 건물은 고려시대의 것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간직했다고 한다. 극락전 바로 앞에는 역시 고려시대에 쌓은 삼층석탑이 있는데 여왕의 돌탑은 삼층석탑 앞에 있다. 그야말로 범부가 한 개씩 쌓은 평범한 돌탑이었지만 여왕이 돌 하나를 더 얹음으로써 영원히 잊히지 않을 유명한 돌탑으로 변신했다.


■영산암의 배롱꽃

봉정사에 가면 잊지 말고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우리나라 10대 정원이라는 멋진 중정을 가졌고 7~8월에는 주홍색 꽃이 피는 배롱나무로 유명한 영산암이다. 조그마하고 소박한 암자에 불과하지만 워낙 분위기가 안온하고 포근해서 영화 촬영 장소로 자주 활용되기도 했다.

영산암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는 우화루 아래. 이곳을 지나려면 누구나 고개를 숙여야 한다. 남태우 기자 영산암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는 우화루 아래. 이곳을 지나려면 누구나 고개를 숙여야 한다. 남태우 기자

영산암에 들어가려면 누구든지 고개를 숙여야 한다. 출입문인 우화루 아랫부분이 낮아 허리를 뻣뻣이 들면 머리를 부딪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출입문을 이렇게 낮춘 것은 모두에게 겸손을 강조하기 위해서일까.

우화루 밖에서는 영산암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영산암은 건물 여섯 동이 사방을 에워싼 폐쇄형 구조로 돼 있기 때문이다. 우화루 아래로 고개를 숙여 들어가야 이 암자의 본래 모습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우화루 아래를 지나자마자 저절로 감탄이 터지게 만드는 고즈넉하면서 조용한 중정이 나타난다. 중정을 꾸민 장식이래야 소나무 한 그루와 배롱나무 한 그루, 그리고 작은 돌탑 하나가 고작이다. 그런데도 엄청난 화초를 심은 유럽 유명 궁전의 초대형 정원보다 더 아름다워 보인다. 봉정사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고건축의 미학을 전혀 모르는 문외한도 한옥의 아름다움과 다양한 표정을 담은 마당의 멋스러움에 넋을 빼앗기게 된다’라고 소개돼 있다. 정확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한 관람객이 봉정사 영산암 중정에 활짝 핀 배롱꽃과 전각을 살펴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한 관람객이 봉정사 영산암 중정에 활짝 핀 배롱꽃과 전각을 살펴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배롱꽃은 제철을 맞아 활짝 피었다. 화사한 주홍색 꽃이 푸른 숲속에 숨겨진 검은 기와지붕의 전각과 오랜 친구처럼 절묘한 조화를 이룬 모습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

신발을 벗고 우화루에 올라가 마루에 앉아 본다. 만세루만큼은 아니지만 미세한 바람이 안팎으로 불어오는 게 꽤 시원하다. 이곳은 숲속이라서 그늘도 꽤 많이 져 만세루보다 차분한 느낌이다. 아래로 내려다보는 전망이 환상적이지는 않지만 마치 어릴 때 동네 뒷산에 숨겨진 ‘나만의 비밀공간’ 같은 느낌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만세루에 이어 우화루에서도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고 잠시나마 무더운 여름을 잊는다.

한 모녀 관람객이 봉정사 영산암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남태우 기자 한 모녀 관람객이 봉정사 영산암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남태우 기자

우화루에서의 휴식을 끝으로 봉정사에서 내려간다. 이곳은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고 소문이 난 곳이다. 기후 위기 때문에 최근 수년간 제멋을 보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올해 가을엔 한 번 가봐야겠다. 여름 봉정사와 가을 봉정사의 차이는 어떨지 직접 확인해야겠다.



남태우 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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