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올림픽과 타히티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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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파도를 가르는 시원한 서핑. 기원은 태평양 섬나라에서 처음 행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폴리네시아에서 시작된 서핑은 애초 놀이가 아니었다. 누가 더 화려한 기술로 큰 파도를 타는지를 겨뤄 사회적 지위와 존경의 척도로 삼았다고 한다. 서핑에 관한 가장 유명한 기록은 하와이 제도를 발견한 18세기 유럽 선장 제임스 쿡의 일기다. 1779년 나무판자 위에서 파도를 타는 타히티 사람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노라는 내용이 나온다. 타히티의 바다는 변화무쌍한 파도를 자랑한다. 그중에서도 테아후푸 해변은 ‘전설적인 파도’로 불린다. 타히티는 그렇게 전 세계인이 정복을 꿈꾸며 몰려드는 서핑의 성지가 됐다.

타히티는 남태평양 1000여 개의 섬 중 하나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속해 있다. 그림 같은 섬들과 눈이 시린 청정 해변은 보는 이의 혼을 쏙 빼놓는다. 이번 파리 올림픽을 통해 그 특별한 매력이 전 세계로 타전되는 중이다. 현재 테아후푸에서 열리는 서핑 경기가 세계적 이목을 끌고 있는데, 서핑 선수단 숙소가 바다 위에 떠 있는 크루즈선에 마련된 것도 진귀한 풍경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타히티까지는 약 1만 5700km 거리. ‘올림픽 역사상 개최 도시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경기장’이라는 신기록도 썼다.

그런데 느닷없는 ‘욱일기’ 논란이 세계인의 제전에 찬물을 끼얹을 뻔한 일이 발생했다. 지난달 29일,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는 한 호주 선수가 일본 제국주의 상징 문양이 그려진 서프보드를 사용하려다 제동이 걸린 것이다. 한국은 서핑 종목에 출전하지 않았지만, 해당 선수의 SNS 게시물을 본 한국 서핑 국가대표팀 감독의 제보로 대한체육회가 호주 측에 항의했고 다행히 문제의 보드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아냈다. 욱일기 보드가 전 세계로 소개되는 걸 막아내긴 했어도 이번 올림픽에서 각종 차별을 받은 우리로서는 영 찜찜한 마음을 감추기 힘들다.

태평양 지역은 역사적으로 유럽의 대항해 시대와 제국주의를 거치면서 식민 지배를 받는 아픈 역사를 겪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이 저지른 숱한 전쟁범죄로 고초를 겪은 곳도 태평양 섬나라들이다. 냉전 시대엔 강대국들의 주요 핵실험장으로 희생을 강요당했다. 지난 시대가 낳은 식민 착취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스릴 넘치는 서핑도 좋지만 이를 마냥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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