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이여, 시의 늪에서 달아나라”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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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60년 되어가는 강은교
16번째 시집 ‘미래슈퍼 옆…’

강은교 시인이 열여섯 번째 시집 <미래슈퍼 옆 환상가게>를 냈다. 강은교 제공 강은교 시인이 열여섯 번째 시집 <미래슈퍼 옆 환상가게>를 냈다. 강은교 제공

강은교(79) 시인이 열여섯 번째 시집 <미래슈퍼 옆 환상가게>(민음사)를 냈다. 강 시인은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으니 시력(詩歷)이 어느덧 거의 60년이 되어 간다. 강 시인은 ‘마지막 시집’이나 ‘절필’은 너무 어려운 말이라고, 부드러운 어조지만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리고 시인들에게 ‘늪’에서 달아나라고 충고했다. 잘 써보려는, 상이라도 한번 받아 보겠다는 생각의 늪을 떠나라는 이야기였다.

강 시인은 시의 소재로 ‘노을’을 곧잘 사용한다. 이번에도 ‘노을이 질 때’가 들어 있다. ‘“고모, 노을이 질 때가 됐어요” 나는 이층 계단에 올라서서 외쳤어. 그리고 마구 뛰어 올라갔어. 구석에 있던 의자를 번쩍 들고,/고모가 느릿느릿 걸어오셨어. 고모는 의자에 풀썩 앉으셨어. 마치 싫은 자리에라도 억지로 앉는 듯이, “고모, 고모, 어디 아프세요?” “아니, 아니, 노을을 보려니 내가 사라지는 것 같애” 고모의 비스듬한 웃음, 나는 고개를 숙였어. 나도 사라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야. 우리는 나란히 해를 바라보기 시작했어.’

찬란한 슬픔이 느껴진다. 박혜진 문학평론가는 “이제 쓸쓸함을, 홀로임을, 울음을, 늙음을 아는 강은교”라며 “노년기라는 단어 대신 ‘노을기’라는 말을 쓰면 좋겠다”고 평했다. 이번 시집에도 고모가 자주 등장해 궁금증을 자아낸다. 고모는 한국 무속 신화에 나오는 당고마기고모로, 그의 ‘시적 식구’로 해석해야 한다.

‘다시 살아도 이렇게 살게 될 거야/스무 살에 연애를 하고/둬번쯤 긴 키스를 꿈꾸다가/사소한지 모르는 이별을 하고…문득 별이 가까이 오는 저녁이면/뉴스를 보며 내가 그 여러 통계의 하나임을 실감하고/사소하고 사소하게 잠드네.’ 시 ‘인생’은 비록 누추해도 지금 우리들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세월이 가능하게 해 준 ‘용서’다. ‘이제 쓸쓸함을 아는 이는/용서해 다오, 나는 어느 날의 먼지/이제 홀로임을 아는 이는/용서해 다오 나는 풀잎 한 장 앉았다 가는 서러운 창틀/이제 울음을 아는 이는/용서해 다오, 나는 너무 넓은 우산을 폈었음을/이제 늙음을 아는 이는/용서해 다오, 나는 너무 긴 황금빛 햇살을 앉히려 했었음을.’

그런데 ‘필립스 다리미’는 이상하게도 다른 느낌이다. ‘배 같은 필립스 다리미/주름의 바다를 가네/스팀처럼 주름의 파도를 내뿜네/실크들이, 린넨들이/주름의 파도를 줍네/안녕 안녕 안녕/주름이여, 바다여, 파도여, 거품이여.’ 구겨진 기억을 펴는 다리미가 역동적이다. 시인은 작은 마당이 생긴 뒤 손빨래와 다림질을 하다, 뜻밖에도 마음이 정화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나이 듦 속에서 건재한 젊음 하나가 통쾌하다.



<미래슈퍼 옆 환상가게> 표지. <미래슈퍼 옆 환상가게> 표지.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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