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부산 찾은 길 후 “역사에 남을 명작 그리고 싶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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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후 작가, 고향서 첫 개인전
31일까지 아난티 컬처클럽
60여 점 평면과 조각 등 전시
독특한 선과 색, 질감 돋보여

길 후 ‘현자’. 학고재 제공 길 후 ‘현자’. 학고재 제공

길 후 ‘무제’. 학고재 제공 길 후 ‘무제’. 학고재 제공

“이런 작가가 어디서 나타났나 싶어요. 일찍 만나지 못한 게 아쉽죠.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유럽 갤러리들을 비롯해 세계적인 아트페어에 꾸준히 소개할 예정입니다. ”

서울 학고재 갤러리 우찬규 대표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미술판에서 차분하기로 소문난 우 대표가 이 정도로 말한다면 작가는 분명 판을 흔들만한 무기를 가졌다는 뜻이다. 그 주인공은 길 후 작가이다.

미술을 좀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길 후 작가가 누구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미술 취재를 10여 년 한 기자조차 길 후 작가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올해 아트 부산에서 학고재 부스에서 이름을 본 것이 전부였다. 그것도 길 후 작가와 연이 있는 지인이 부산 출신이니 이름은 기억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길 후 작가는 부산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지만 정작 부산에서 전시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부산 기장의 빌라쥬 드 아난티 컬처클럽에서 31일까지 열리는 ‘길 후 개인전-불이(不二)’를 보기 위해 개관 첫 날인 1일 오전에 전시장을 찾았다. 아마도 작가에 대한 궁금증을 빨리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부산에서 층고가 가장 높을 것이라는 평가를 듣는 아난티 컬처클럽의 공간은 100호부터 300호까지 길후 작가의 대형 작품과 잘 어울렸다. 통창 너머로 자연이 빛나고 커다란 벽에 자리잡은 작품은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뿜으며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전시장은 이번 전시 제목인 ‘불이(不二)’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한다. 불교 경전인 <유마경>에서 대립을 떠난 경지를 ‘불이(不二)’라고 부른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내 것과 내 것 아닌 것의 경계가 사라져 일체 평등한 경지를 뜻한다.

길 후 작가는 수 십년간 만물의 근원과 감각의 영역을 초월하는 세계를 탐구해왔다고 한다. 2010년대부터 선보인 ‘현자’와 ‘사유의 손’ 시리즈에서 작가는 변화하는 인간의 삶에서 포착된 깨달음의 순간을 그려냈다.

특히 ‘현자’ 시리즈는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10~15년이 걸릴 정도로 공이 들어간 작품이다. 평면 작품이 왜 이렇게 오래 걸리나 싶겠지만, 작품을 보는 순간 이해가 된다. 조각인지 회화인지, 물감인지 금속인지 이 작품의 실체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요즘 작은 부조 작품을 평면처럼 벽에 걸 수 있도록 작업해 입체 회화라고 부르는데 길 후 작가의 ‘현자’ 시리즈는 입체 회화 그 이상의 특별한 무엇이 있다.


길 후 ‘현자’. 학고재 제공 길 후 ‘현자’. 학고재 제공

길 후 ‘현자’. 학고재 제공 길 후 ‘현자’. 학고재 제공

길 후 ‘현자’. 학고재 제공 길 후 ‘현자’. 학고재 제공

2~3미터의 캔버스에 두텁게 쌓인 마티에르는 회화가 아니라 조각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다양한 재료를 섞어 캔버스 위에 쌓아올리고 사포질을 일일히 해서 깍은 후 다시 올리는 과정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반복한다. 그 세월이 10년이 넘어가니 캔버스 위에 형상이 솟구쳐 나오기도 하고 다른 한 쪽에선 용암이 흐르는 듯한 형태도 있다. 돌처럼 딱딱하게 변한 나무를 본 적이 있는데 길후 작가의 마티에르가 바로 그렇게 돌이나 금속처럼 변해버린 듯하다. 수행하듯 묵묵히 오랜 세월을 쌓은 길후 작가의 현자 시리즈는 종교적인 신비함마저 느껴진다.

실제로 이번 부산 전시에선 부처님의 미소를 닮은 현자 작품과 카톨릭에서 기도하는 성인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는 현자가 나란히 걸려 있다. 두 작품의 조화가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일 듯 싶다.

부처의 미소를 닮은 현자와 카톨릭에서 기도하는 손을 그린 듯한 작품이 함께 전시장에 걸렸다. 김효정 기자 부처의 미소를 닮은 현자와 카톨릭에서 기도하는 손을 그린 듯한 작품이 함께 전시장에 걸렸다. 김효정 기자
일필휘지로 빠르게 그리는 유화. 길 후 ‘무제’. 학고재 제공 일필휘지로 빠르게 그리는 유화. 길 후 ‘무제’. 학고재 제공

길 후 ‘춤추는 피카소’. 학고재 제공 길 후 ‘춤추는 피카소’. 학고재 제공

10년 이상 걸리는 현자 같은 작품이 있다면, 빠르면 30분, 늦어도 3시간내 완성한다는 엄청난 크기의 유화 작품들도 전시에서 만날 수 있다.

“명작은 작가의 의도를 빼고 순간적인 열정으로 내면을 토해내는 듯 그려야 한다. 일필휘지의 에너지가 나와야 한다. 300호 대작도 하루만에 몇 개가 나올 수 있는 이유이다. 물론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 때는 6~7개월이 걸려도 한 작품조차 그리지 못하기도 한다.”

길 후 작가가 직접 유화에 대해 설명했다. 이번 유화 작품들도 전시 며칠 전까지 하루 3~4개씩 계속 그린 후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들도 가져왔다고 한다. 빠르게 그린다는 것은 자랑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견에 대해 작가는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독창적인 선과 색이 하나의 화면 안에 얼마나 어울리는지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산 전시장에서 열정적으로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길 후 작가. 김효정 기자 부산 전시장에서 열정적으로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길 후 작가. 김효정 기자

자신의 작품 앞에 선 길 후 작가. 학고재 제공 자신의 작품 앞에 선 길 후 작가. 학고재 제공

사실 작가는 미술판에서 기행으로 유명했던 적이 있다. 밀레니엄을 앞두고 그동안 알려진 이름을 개명했고, 그동안 자신이 그린1만 6000여 점의 작품을 모두 불태워 여러 언론의 기사로 알려졌다. 이후 불쑥 중국으로 시골로 건너가 몇 년간 불도 들어오지 않는 열악한 작업실에서 오직 그림만 그린 적도 있다. 중국 시골에서 그림에 미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나자 중국의 유명한 큐레이터가 작가를 찾았고 결국 중국 대표 미술관 중 한 곳에서 전시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인맥이나 네트워크에 관심이 없다. 자신의 전시나 작업을 알리는 활동도 하지 않는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1999년 개명한 이름(김길후)에서 다시 성을 빼고 이름에서 변형한 ‘길 후’라는 작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 변화하겠다는 의지이다.

고향 부산에서 전시를 한다는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60대가 되어 첫 전시를 선보이게 됐다. 작가는 이번 전시가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6만 점의 작품을 그릴 예정이고 역사에 남을 명작을 그리겠다는 말로 그림에 대한 자신감을 내보였다. 학고재 갤러리도 이번 전시를 시작으로 길 후 작가의 외국 진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길 후 ‘무제’. 학고재 제공 길 후 ‘무제’. 학고재 제공



길 후 ‘무제’. 이번 전시에선 조각도 여러 점 선보였다. 학고재 제공 길 후 ‘무제’. 이번 전시에선 조각도 여러 점 선보였다. 학고재 제공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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