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꾼이 디딜 ‘시간의 징검다리’ 놓은 정영만 구음 빛나 [부산문화 백스테이지]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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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부산국악원 영남춤축제
진옥섭 기획 ‘영남무악’ 주목

영남 유일의 삼현육각 전승
남해안별신굿 정영만 일가

영남지전춤·영남승무 반주
‘영남춤엔 영남악’ 취지 살려

정영만(서 있는 이)과 남해안별신굿 연주 모습. 국립부산국악원 제공 정영만(서 있는 이)과 남해안별신굿 연주 모습. 국립부산국악원 제공

‘호남은 소리, 춤은 영남’이라고 했다. 영남엔 최고 춤꾼이 많았다. 그런데 춤을 부르는 영남무악(舞樂·춤 음악)이 자취를 감춰 호남이나 경기의 악에 맞춘다고 한다. 영남 하면 춤인데 춤 음악 대부분이 영남악(樂)이 아니라니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다.

올해로 7회째를 맞은 국립부산국악원의 2024 영남춤축제 ‘춤, 보고 싶다’ 일환으로 지난 3일 오후 국립부산국악원 예지당에서 선보인 ‘영남무악’이 그 질문에 답했다. 춤 음악의 근본은 김홍도의 ‘무동(舞童)’에 나오듯 좌고, 장고, 목피리, 겹피리, 대금, 해금 등 삼현육각인데 영남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통영의 삼현육각 시나위(한국 무속음악의 일종으로 정형화되지 않은 기악곡)를 중심으로 판을 만든 것이다. 경상좌도(낙동강 동편)에서 가장 춤이 흥했던 동래의 반주음악 전승이 끊어졌고, 경상우도(낙동강 서편)의 풍류 본향 진주 삼현육각도 지금은 사라졌기에 이날 정영만과 남해안별신굿이 보여준 영남무악은 그만큼 귀한 자리였던 셈이다.

'영남무악'을 기획, 연출한 진옥섭. 국립부산국악원 제공 '영남무악'을 기획, 연출한 진옥섭. 국립부산국악원 제공

이날 공연의 기획·연출을 맡은 진옥섭은 “춤은 발로 노닐고, 음악은 손으로 하니, 춤판이란 손발이 척척 맞아야 한다”며 “춤을 보면 음악이 들리고, 음악을 들으면 춤이 보이는 것이 판다운 판”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연주는 징과 구음을 맡은 정영만(국가무형유산 남해안별신굿 보유자)을 필두로 자녀인 정석진(피리), 정승훈(대금), 정은주(해금), 그리고 제자 이현호(장구), 신승균(타악), 이정민(가야금)이 함께했다. 특히 정영만 선생의 구음은 “춤꾼이 디딜 발밑에 시간의 징검다리를 놓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최고의 춤 음악을 선사했다.

처용신을 모신 '무제' 공연 모습. 국립부산국악원 제공 처용신을 모신 '무제' 공연 모습. 국립부산국악원 제공

영남무악의 시작은 처용이 등장하는 ‘무제(舞祭)’가 알렸다. 김운태와 연희단팔산대, 그리고 정영만과 남해안별신굿 악사들이 함께 처용을 부르는 노래를 하며 파란 천 위에 달걀 흰자위와 참깨로 처용을 그려 무대 위로 걸어 올리자, 객석에선 환호와 함께 큰 박수가 쏟아졌다. 이윽고 영남무악에 참가하는 춤꾼 전원이 무대로 나와 한바탕 즉흥춤을 춘 뒤 처용신에게 예를 갖추는 것으로 무제는 끝이 났다.

이민아가 이매방류 살풀이춤을 추는 모습. 국립부산국악원 제공 이민아가 이매방류 살풀이춤을 추는 모습. 국립부산국악원 제공
이지영의 승무 공연 모습. 국립부산국악원 제공 이지영의 승무 공연 모습. 국립부산국악원 제공

본격적인 춤 무대는 남해안별신굿 반주에 맞춰 호남 출생(전남 목포)이지만 영남(부산)에서 춤을 완성한 것으로 평가받는 이매방류 살풀이춤을 춘 부산춤꾼 이민아가 열었다. 이민아는 2022년 이 춤으로 제46회 부산동래전국전통예술경연대회에서 기악·무용일반부종합대상(1위·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어진 무대는 서울대 음대 국악과 교수로 있는 이지영이 어린 시절 기억을 되살려 선보인 승무였다. 이지영은 가야금으로 일가를 이뤘지만, 경주의 예기 이말량(1908~2001)에게 가무악을 사사한 덕택에 통영 삼현육각 반주로 옛 영남승무 모습을 선보일 수 있었다.

동래학춤 공연 모습. 국립부산국악원 제공 동래학춤 공연 모습. 국립부산국악원 제공

김갑용의 영남지전춤 공연 모습. 국립부산국악원 김갑용의 영남지전춤 공연 모습. 국립부산국악원

동래학춤은 부산에선 비교적 자주 만날 수 있는 무대지만, 김태형의 쇠가락, 김신영의 구음, 남해안별신굿의 타악이 합을 맞췄다. 김갑용이 춘 영남지전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남의 박병천 음악에 맞추던 것을 영남으로 바꿔서 제대로 그 맛을 살려보자며 남해안별신굿 음악에 맞춰서 췄다. 원래도 이 춤은 망자를 위한 춤이지만 시나위 음악에 스며들어서 무거운 듯 적적하면서도 우아함을 연출했다.

신은주의 '굿 바라' 공연 모습. 국립부산국악원 제공 신은주의 '굿 바라' 공연 모습. 국립부산국악원 제공
김운태의 '채상소고춤' 공연 모습. 국립부산국악원 김운태의 '채상소고춤' 공연 모습. 국립부산국악원

신은주 창작춤 ‘굿 바라’는 남해안별신굿 즉흥음악에 맞춰 맨발로 춤을 추는데 굿판의 즉흥성과 영남의 파릇파릇한 기세가 어우러져 흥과 신명이 넘쳤다. 김운태의 채상소고춤은 특히 압권이었다. 소고는 어깨에 메고 상모를 돌리면서 바람개비처럼 ‘연풍대’를 돌거나 몸을 공중으로 날려 비트는 ‘자반뒤집기’는 기예의 극치였다. 현재 ‘연희단팔산대’ 이사장으로, 호남 여성농악단의 명맥을 잇고 있는 김운태는 유랑 시절 경기와 부산 조방 앞 등에서 공연하며 익힌 영남 춤을 더해 자신의 바디를 만들었다고 한다.

연희단팔산대 공연 모습. 국립부산국악원 제공 연희단팔산대 공연 모습. 국립부산국악원 제공

이날 공연은 오후 5시에 시작해 7시를 넘길 때까지 계속됐다. 객석에선 웃음과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2시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장쾌했다. 한편 영남무악은 일부 출연진과 작품을 변경해 내달 서울에서 열리는 제27회 서울세계무용축제(시댄스 페스티벌)와 오는 10월 부산에서 열리는 2024 부산국제공연예술마켓(BPAM)에서도 각각 공연된다. 영남무악이 새로운 영남춤 브랜드 공연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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