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가옥에서 낭독과 필사로 익히는 ‘긴 호흡’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오초량’ 책 읽기 과정 참관기
손 글씨 쓰기, 명상 같은 효과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수업”


전국의 책방과 도서관을 돌며 노래하는 가수 겸 작가 이내 씨가 ‘오초량’ 정원에서 자리를 펼쳤다. 전국의 책방과 도서관을 돌며 노래하는 가수 겸 작가 이내 씨가 ‘오초량’ 정원에서 자리를 펼쳤다.

일맥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부산 동구의 복합교육문화공간 ‘오초량’에서 여름학교를 운영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음식, 몸, 마음, 감각 등 다양한 분야의 멘토와 함께 먼저 자신을, 그리고 주변이나 지역과 함께 살아가는 동시대를 돌아보자는 취지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마음을 돌보는 책 읽기’라는 프로그램이 눈에 띄었다. 요즘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하지만 함께 책을 읽는 독서 모임은 늘어나는 모순된 현상의 이유가 이전부터 궁금했었다. 3일 오초량에서 열린 책 읽기 수업에 참가해 체험해 보기로 했다.

‘백년가옥’으로 불리는 오초량은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주택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막상 들어서 보니 아파트 숲으로 둘러싸인 도심 속에서 숨 쉴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공간이었다. 대체 토요일 오전 8시에 열리는 책 읽기 수업에 누가 올까 싶었다. 놀랍게도 회차별 제한 인원 6명이 이날 빠짐없이 다들 늦지 않게 왔다.


백년가옥 오초량에서 ‘마음을 돌보는 책 읽기’ 수업이 열리고 있다. 오초량 제공 백년가옥 오초량에서 ‘마음을 돌보는 책 읽기’ 수업이 열리고 있다. 오초량 제공

먼저 멘토 강사부터 소개해야 하는데, 이분 소개가 참 간단치 않다. 자칭 ‘동네 가수’인 가수 겸 작가 이내(김인혜) 씨다. <모든 시도는 따뜻할 수밖에> 등을 쓴 작가이자, 음반을 3개나 낸 싱어송라이터다. 부산에 살면서 전국의 작은 책방, 도서관, 학교를 돌면서 이야기와 노래로 사람들의 빈 가슴을 채우는 일을 하고 있다. 그가 가는 곳은 팝업서점 ‘이내책방’이 되기도 한다. 책과 노래를 싣고 다니는 우리 시대의 음유시인이라고 할까.

이내 씨는 “자연은 순환하는 시간 속에 사는데 인간만이 직진하는 시간 속에 사는 것 같다”면서 참가자들에게 오늘은 자연 속에서 자기의 이름을 골라보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바람, 산들(바람), 소금, 가을, 구름, 목련, 돌이 되었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백석의 시 ‘바다’를 가사로 해서 만든 노래를 통기타 라이브로 들으며 주말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마음을 돌보는 책 읽기’는 낭독, 필사, 글쓰기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낭독과 필사를 하는 이유는 ‘편하고 빠르게’가 아니라 힘들더라도 조금 더 몸을 써서 읽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날의 교재인 미국의 시인 메리 올리버가 쓴 산문집 <긴 호흡>을 나누어 낭독하기 시작했다. 눈을 감는 사람도 있었다. 리드미컬한 소리가 머릿속에 이미지를 만들었다. 사람의 목소리로 글을 듣자 저자가 진짜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읽는 소리가 그렇게 좋은 줄 미처 몰랐다. 책 읽기는 즐거운 일이었다.


필사는 귀찮고 힘들지만 저자와 가까워지는 느낌을 준다. 오초량 제공 필사는 귀찮고 힘들지만 저자와 가까워지는 느낌을 준다. 오초량 제공

<긴 호흡>에는 메리 올리버가 30년 넘게 늘 뒷주머니에 작은 공책을 넣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공책에는 결국 시에 등장할 문구나 아이디어가 담기지만 일부는 영영 완성되지 못하기도 한다. 그것들이 ‘어쩌면 추운 날 뿌리는 씨앗일 수도 있다’라고 쓴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이내 씨는 직접 만든 수제 공책을 나눠 주고 20분 동안 책 속에서 발견한 문장의 필사를 시켰다. 오랜만에 해 본 필사는 역시나 귀찮고 조금은 힘들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 나의 손 글씨 공책을 만나면 반가울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가 필사는 명상 같다고, 또 다른 누구는 저자와 거리가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고 했다.

이날의 수업은 ‘15분 글쓰기’가 마지막 순서였다. 어쩌면 그렇게 다들 준비된 작가처럼 글을 써 내려 가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백 년 세월을 견뎌낸 공간이 사각사각 글쓰는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우린 돌아가면서 자기가 쓴 글을 낭독했다. 교사인 ‘구름’이라는 분이 “학교 폭력으로 문제가 된 학생들을 선도할 프로그램이 부족하다. 이런 학생들을 불러 앉혀 오늘 이 시간처럼 마음을 다독이는 책을 함께 읽어 가도 좋겠다”라고 했다. 이내 씨는 “공부는 머리만 발달시키기에 몸으로 하는 속도와 생각의 속도가 달라져 절망감이 커지기 쉽다. 낭독과 필사는 실제로 몸을 활용해서 하는 행위라 우리의 어그러진 속도감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백 년 세월을 견딘 공간이 글을 읽고 쓰는 소리로 채워졌다. 오초량 제공 백 년 세월을 견딘 공간이 글을 읽고 쓰는 소리로 채워졌다. 오초량 제공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