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그 여름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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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1952~ )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시집 〈그 여름의 끝〉(1990) 중에서

‘끝’은 절정의 감각이다. 완만한 기울기로 넘어감이 아니라 절벽 위에 서서 천 길 나락을 내려다보는 느낌. 절정은 이미 하나의 세계가 완성된 것이기에 더 이상 발 디딜 곳이 없고, 만약 다음 단계가 있다면 그것은 현재의 차원을 봉인하거나 절연하여 초월, 곧 윤회로의 비약만 있을 뿐이다. 계절의 상징에서 여름도 절정의 감각을 환기한다. 여름은 뜨거운 기운으로 생명의 활동이 정점에 이르도록 하는 계절이다. 그 이후는 가을·겨울로서 ‘조락(凋落)’의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 여름과 끝은 내포적 의미에서 필연적 상관성을 가진다.

한 사람이 ‘폭풍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어떠한 희망도 발견하지 못한 채 ‘절망’하게 된다면, 이것도 ‘끝’의 감각으로서 생의 절정감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절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생의 모든 에너지가 소요되는데, 그것을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는 일로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하여 ‘여름의 끝’은 한 세계가 완성되어 무너지고 또 다른 세계가 탄생하는 일이다.

김경복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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