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역지사지형 토론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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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교육 시스템은 전 세계적으로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독일이 체계적이고 안정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주요 이유 중 하나로 교육 시스템을 꼽기도 한다. 이런 평가에는 활성화된 정치 교육이 큰 몫을 했다.

통일 전, 독일(당시 서독)에서는 보수와 진보 간 갈등이 심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교육계는 청소년들이 사회적 다양성을 이해하고 독립적인 판단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노력했다. 1976년 가을, 독일 남부의 작은 시골 도시 보이텔스바흐에는 보수, 진보, 중도를 망라한 교육자와 정치가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들은 여러 차례 회의를 통해 정치 교육의 최소 조건을 정립했다. 그 결과가 바로 보이텔스바흐 협약이다. 이 협약은 교육 현장에서의 이념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했다. 이를테면 학교가 특정 이데올로기나 가치를 강요하지 않고, 학생들이 자신의 정치적 관심사를 가지고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은 이 협약에 따라 지금도 초등학교에서 서로의 입장을 바꿔 말하는 토론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은 통일 후 사회 통합을 이루는 데 기여했다는 평을 받는다.

최근 서울교육청과 경기도교육청이 학생인권조례 폐지 문제를 두고 서로의 입장을 바꿔 말하는 ‘역지사지형’ 공동 토론을 조만간 진행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두 교육청은 지난 6월 미래지향적 숙의형 토론 교육을 위한 한국형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체결했는데, 이번 토론은 바로 그 성과물이다. 진보와 보수를 대변하는 두 교육청의 수장이 역지사지형 토론을 통해 교육 현장의 갈등 해결에 나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지난 몇 달 동안 국회에선 토론과 합의가 사실상 실종됐다. 이런 정치권에 역지사지형 토론을 권한다. 여야 주장이 팽팽한 법안을 놓고 여당은 야당 입장에서, 야당은 여당 입장에서 토론하는 것이다. 결론을 못 내어도 좋다. 토론 과정에서 일정 부문 공통분모를 도출할 수 있다면 그게 성과다. 그러면서 서로를 이해해 나가는 것, 지금 정치권에 당장 필요한 토론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소통 방식은 일상에서도 필요하다. 이처럼 소통해야 이 첨예한 적대적 갈등의 시대에 중간 지대도 넓어질 수 있다. 그게 건강한 사회다.

독일의 정치학자 테오도어 에센부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도 독재자로 태어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성숙한 시민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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