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학수의 문화풍경] 다시 보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전쟁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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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대 철학과 교수

“대립과 갈등, 투쟁은 세상 만물의 본성”
전쟁도 변혁·창조 원동력 '긍정성' 내재
나쁘다 비판만 말고 철저하게 대비해야

〈신약성경〉의 에베소서(書)는 사도 바울이 에페소스의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에페소스(Ephesus)는 이오니아 해변에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도시인데, 현재 튀르키예의 셀추크 근처이다. 이 도시는 튀르키예의 관광 중심지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지구로 지정될 정도로 유명하다. 기원전 550년에 건립된 아르테미스 신전이 여기에 있었는데, 이것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이다. 이뿐 아니라 에페소스는 기원전 500년 경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그는 사상이 ‘혐인(嫌人)’ 성향을 보여, 우는 철학자로 알려졌다. 반면 원자론의 창시자 데모크리토스는 웃는 철학자로 불렸다. 그리스 말에서 유래한 혐인(misanthropy)은 증오와 인간을 각각 의미하는 미소스(misos)와 안트로포스(anthropos)로 구성되어, 인류에 대한 혐오를 가리킨다. 인간은 별것 아닌 존재라는 인류 혐오적 태도는 인간에게는 나쁜 성향이 불가피하다는 판단 때문에 일어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기적 존재여서 탐욕과 질투를 피할 수 없다고 누군가 믿고 있다면, 그는 인류에 대해 혐오적 태도를 취하기 쉬울 것이다. 혐인 성향의 반대 개념은 애인 성향(philanthropy)이다. 맹자처럼 인간의 본성이 선량하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인류를 사랑하는 애인적 태도로 행동할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혐인 성향은 투쟁과 경쟁에 긍정적 역할이 있다는 통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람들은 예로부터 평화를 좋아하고 싸움을 싫어한다. 그런데 투쟁이 인간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는 점을 누군가가 인정한다면, 그는 인류 혐오적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 하면 떠오르는 것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만물 유전 사상이다. 그의 사상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 무엇인지 캐물었다. 이 세상은 서로 대립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서로 싸우고 그 결과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핵심 사상이다. 차가운 공기와 뜨거운 공기가 서로 대립하여 기후의 변화가 일어나고, 가난한 집단과 부유한 집단이 서로 갈등하여 사회의 변화가 일어난다. 파리 올림픽에서도 선수들이 메달을 놓고 경쟁하는 가운데 서로가 변화한다. 대립은 국가 사이에도 발생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그리고 이스라엘과 아랍이 투쟁하며 세계의 경제와 정치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이며 왕이다. 그는 어떤 것은 신으로, 어떤 것은 인류로 드러내고, 어떤 사람은 노예로, 어떤 사람은 자유인으로 만든다.” 여기서 헤라클레이토스는 전쟁을 아버지나 왕으로 의인화하고, 갈등이 자연이나 사회에서 변혁과 창조의 원동력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황제나 천자는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백성은 그에게 복종한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결정하는가? 투쟁이다. 고대 사회에서 어떤 사람은 자유인으로, 어떤 사람은 노예로 살아간다. 전쟁에 지는 국가의 사람들은 승자의 노예가 되었던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전쟁에 긍정성이 있음을 통찰한다.

반면 평화주의는 전쟁에 반대하며 전쟁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다. 비폭력 사상은 폭력 없이 갈등을 해결하자고 주장한다. 철학적 형태의 평화주의는 폭력은 그 자체로 나쁘다는 믿음에 토대를 두고 있다. 폭력 행동이 일으키는 결과와 상관없이 폭력 자체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으므로 폭력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단순한 논리가 철학적 평화주의의 입장이다. 평화주의에 몇 가지 종류가 있다. 절대적 평화주의는 어떤 경우에도 비폭력의 원칙은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며, 상대적 평화주의는 자위권이나 타인에게 임박한 위험이 닥칠 경우와 같은 극단적 경우에만 폭력의 사용을 허용한다. 실용적 평화주의는 협상 같은 평화적 수단이 전쟁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믿는 입장이다.

그러나 철학적 평화주의가 인간 존재를 너무 이상화하여 삶의 조건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필자도 이런 입장이다. 인간은 평화뿐 아니라 투쟁이나 공격의 본성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타인과 평화롭게 살아가려고도 하지만, 타인보다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경쟁하기를 바란다. 나아가 폭력 그 자체가 나쁘다는 평화주의의 명제도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 폭력이 그르다는 점에 많은 사람들은 감성적으로 동조한다. 그러나 그 명제는 입증되지 않았다. 사실 이런 윤리적 명제의 객관적 증명은 불가능하다.

대중은 평화주의를 높이 평가하여 붓다, 예수, 간디 같은 평화주의자를 존경한다. 그런데 평화주의는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이며 이론적 결함을 내재하고 있다. 전쟁과 투쟁이 불가피한 삶의 조건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쟁은 나쁘다고 비판만 하지 말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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