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닳아 무너지는 동안 할머니 무릎도 닳고 닳았다[산복도로 '볕 들 날']

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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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복도로 '볕 들 날'] 1. 최선이 할머니와 오른 2662 계단

일주일간 오른 계단만 2662개
발 디딜 공간 없어 더 위험천만
40년 넘게 오르내리며 골병만
계단 피해 버스 타려면 하세월
돈 들인 웹툰거리는 ‘그림의 떡’
보기 좋아도 살긴 힘든 산복도로

어르신들에게 산복도로는 그저 고단하고 벗어나고픈 주거지다. 최선이 할머니가 지난 4일 오후 부산 동구 범일동 경로당에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어르신들에게 산복도로는 그저 고단하고 벗어나고픈 주거지다. 최선이 할머니가 지난 4일 오후 부산 동구 범일동 경로당에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부산일보〉 취재진은 산복도로의 중심에서 소외된 주민의 삶을 직접 경험하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산복도로를 찾았다. 7일간의 동행 취재 결과, 산복도로가 보기에는 좋아도 살기에는 힘든 곳이라는 게 명확해졌다.

2662개. 1주일간 부산 동구 산복도로에 거주하는 최선이(79) 할머니를 따라 오른 계단의 개수다. 70층 높이에 해당하는 계단 수로, 할머니는 매일 아파트 10층을 오르고 있는 셈이다. 외지인들은 산복도로가 “예쁘다”고 감탄하지만, 무릎의 연골이 닳아 없어진 고령의 할머니에게 산복도로는 이제 어떤 낭만도 없다. 그저 고단하고 벗어나고픈 주거지일 뿐이다.

■사방을 가로막은 계단

여전히 따가운 볕이 내리쬐던 지난 4일 오후. 부산 동구 도시철도 1호선 좌천역에서 멀지 않은 증산로 146개 계단 중턱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 최선이 할머니를 만났다. 친구들을 만나려 노인정에 가는 길이라는 할머니는 40여 년을 오르내린 계단이 날이 갈수록 버거워진다며 한숨을 내쉰다.

할머니는 1983년 산복도로에 정착한 뒤 수십 년간 계단을 오르내렸다. 지난해 초 양쪽 무릎 수술 뒤에도 여전히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다. 발을 뗄 때 마다 무릎에서 통증이 올라와도 어쩔 수 없다. 연골이 망가지는 동안 계단들도 부서지고 무너졌다. 그것이 할머니를 더 힘들게 한다. 할머니는 “높은 계단을 오르는 것이 힘들어 지팡이를 짚으려고 해도, 곳곳이 무너져 좁아진 계단엔 지팡이는 고사하고 발 디딜 공간도 없다”며 “비 오는 날이면 부서진 틈에 발이 걸려 미끄러질까 아예 집 밖을 나오지 않는다”고 고충을 쏟아냈다.

수십 개의 계단을 지나 도착한 경로당엔 이미 비슷한 연배의 주민 7~8명이 과일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모두가 허리가 굽었고, 하나씩 지팡이를 지니고 있다. 무릎 수술을 받지 않은 이는 드물었다. 최 씨 할머니뿐만 아니라 산복도로에 삶을 꾸린 이들 모두에게 닳아 사라지는 무릎은 숙명 같은 것이었다.


최선이 할머니가 지난 10일 오후 지나쳤던 부산 동구 범일동 성북시장 인근 동구 만화 체험관. 할머니는 이곳을 방문한 적이 없다. 최선이 할머니가 지난 10일 오후 지나쳤던 부산 동구 범일동 성북시장 인근 동구 만화 체험관. 할머니는 이곳을 방문한 적이 없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버스

6일 오전 8시 최선이 할머니는 분주하게 집을 나선다. 아무리 계단이 고통스러워도, 갇혀 살 수는 없다. 장을 봐야 하고, 병원을 가야 하고, 누군가를 만나 외로움을 잊어야 한다. 이날은 친구 2명과 마을 아래 ‘수정시장’에 가기로 했다. 할머니는 “나이가 들어 몸이 불편해졌다고 해서 집 안에 갇히고 싶지는 않아”라며 힘든 발걸음을 내디뎠다.

수정시장은 걸어서 20분 거리. 하지만 일행은 30분 째 멍하니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계단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지”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할머니들은 그 짧은 거리를 38번 버스와 87번 버스로 갈아타며 갈 계획이다. 계단이 많은 정류장을 피하기 위해서다. 버스 노선이 정해질 때, 계단을 피해야 하는 이들의 사정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니 짧은 거리를 버스로 빙빙 돌아가며, 2~3배의 시간을 들여야 한다.

할머니는 “택시 타고 가는 게 제일 편하기야 하지만 그런데 쓸 돈이 어디있노”라며 “좀 오래 걸리고 힘들어도, 계단을 피하려면 버스를 타야지 어쩔 수 있나”고 말했다.

■“르네상스? 그게 뭐꼬”

10일은 이웃집 할머니가 손녀와 함께 놀러오는 날이다. 최선이 할머니는 이웃집 손녀에게 먹일 걸 사러, 오랜만에 마을에서 꽤 떨어진 성북시장을 향했다.

성북시장은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을 통해 웹툰거리로 조성됐다. 웹툰으로 꾸며진 간판을 바라보던 할머니는 동네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묵을 고르던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 몫까지 여러 개를 구매했다. 동네사람 모두가 외출이 어려운 고령이니, 온 김에 여기저기 나눠주기 위해서다.

장을 본 할머니는 웹툰 박물관 앞을 지났다. “뭐 하는 데인진 잘 모르겠어. 가본 적도 없고. 옛날에 있던 떡방앗간이 카페로 변해 낯설기만 하지”라며 무심하게 말했다.

할머니는 몇 년 전 부산시에서 돈을 들여 성북시장을 발전시킨다는 이야기기를 듣고 누구보다 반겼다. 하지만 지금 성북시장이 웹툰 거리로 바뀐 이후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주황색, 흰색이 어우러진 웹툰 거리에서 살아가는 할머니와 상인들의 삶은 제자리다.

할머니는 산복도로가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이 되기를 바란다. “나 때는 이미 글렀더라도, 우리 후손들이라도 산복도로에서 좀 편하게 살아봤으면 하는 마음이야” 올라야 할 계단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 할머니는 오늘도 더 나은 산복도로를 그린다.

글·사진=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


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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