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겁의 세월 침묵하며 거친 풍파 이겨낸 천혜의 조각품… ‘갈 때마다 다른 느낌’ 제주도 서귀포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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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성 기자 paper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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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 활동이 만든 천연기념물 대포주상절리대
파도 부딪칠 때마다 생기는 하얀 포말에 ‘탄성’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작품 본태박물관
전통 공예·현대 미술 절묘한 어우러짐에 ‘감동’

제주도 중문 대포주상절리대의 검은 현무암 기둥에 부딪치는 파도의 하얀 포말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감을 준다. 김진성 기자 paperk@ 제주도 중문 대포주상절리대의 검은 현무암 기둥에 부딪치는 파도의 하얀 포말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감을 준다. 김진성 기자 paperk@

제주도는 갈 때마다 다른 느낌이다. 날씨마저 그렇다. 제주를 방문하면서 같은 날씨가 사흘 이상 지속된 적이 없었다. 제주 해안가와 오름 등 천혜의 자연경관을 접하면 마치 원시시대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지만, 박물관이나 잘 지어진 카페, 호텔 등을 보면 현대 문명의 한가운데 와 있는 느낌도 든다. 여러 얼굴을 가졌지만 묘하게 잘 어울린다. 제주도의 남쪽인 서귀포를 다녀왔다.

■억겁의 세월이 빚어낸 검은 성벽, 중문 대포주상절리대

10월 중순 도착한 제주는 제107회 전국체육대회가 한창이다. 이번 체전은 제주도 남쪽인 서귀포에서 주로 열렸다. 아침까지 맑았던 날씨는 제주 도착 직후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검게 흐렸다. 이런 날 제주도 남쪽 해안가는 어떤 모습일까. 중문의 대포주상절리대가 떠올랐다. 택시에 올라 달렸다. 한참을 가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오락가락하는 비는 그런대로 견딜 수 있다. 비 오는 해안가도 제법 운치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안개였다. 서귀포로 가는 내내 안개가 따라다녔다. 중문에서도 안개가 자욱하다면 그야말로 낭패다. 잘못하다간 신비한 주상절리대 구경은커녕 안개와 파도소리만 듣게 되는 것이다.

대포주상절리대에 도착하니 안개가 개였다. 운이 좋았다. 빗방울이 드문드문 떨어지긴 했지만 상관없다. 마음이 급했다.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해안가로 달렸다. 해안가 도착 전 현무암으로 이뤄진 작은 정원과 관람객들이 쌓아 올린 것으로 추정되는 돌무더기는 관심도 없었다.

덱을 통해 해안가로 내려가니 거친 바다와 맞닿은 해안가에 정교하게 깎아 놓은 듯한 거대한 돌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급한 마음탓일까. 그냥 돌기둥처럼 보였다. 호흡을 고르고, 하얀 파도가 부딪치는 검은 돌기둥을 보는 순간,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억겁의 세월을 침묵하며 자리 지켜온 검은 돌기둥이 마치 성벽 같이 굳건하다.

제주 서귀포시 중문과 대포 해안에 위치한 주상절리대는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천연기념물이다. 주상절리는 주로 현무암질 용암류에서 나타나는 수직 형태의 절리를 말한다. 오래전 화산 분화구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바다와 만나 급격히 식으면서 부피가 줄어들고, 그 과정에서 수직으로 갈라진 틈이 4~6각형의 다양한 형태를 이루게 된 것이다. 높이만 30~40m의 거대한 돌기둥은 멀리서 보면 사람이 정교하게 다듬은 인공 석조물처럼 보인다. 검은 기둥으로 된 성벽 같은 모습은 3.5km 해안선을 따라 생겨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파도가 성벽을 때릴 때마다 하얀 포말이 생기며 검은 돌기둥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검은 성벽과 수평선을 한 눈에 바라보면 아늑함마저 든다. 이곳을 찾은 100여 명의 관람객들은 파도가 검은 기둥과 부딪쳐 하얀 포말을 만들 때마다 탄성을 질렀고, 한쪽에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중국인을 포함해 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서귀포에 오면 꼭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성벽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죽으려면 이런 곳에서 죽어야 겠다”는 한국말이 들려 온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말한 이를 바라보니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다. 다행이다 싶다.

얼마를 있었을까. 밀려드는 관람객들을 뒤로하고 산책로를 걸었다. 주상절리대를 배경으로 한 산책로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난다. 산책로 중앙에 조성된 10여 그루의 높은 야자수의 모습은 고대 로마시대 콜리세움의 검투사를 닮았다.

산책로를 천천히 돌고 나니 편안해 졌다. 급한 마음에 곁눈질했던 정원이 이제서야 제대로 보인다. 낮은 현무암으로 이뤄진 정원에 온갖 풀과 갈대가 모습을 뽐낸다. 한 관람객이 정원에 들어가 누군가의 돌탑 위에 돌 하나를 얹는다.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소원이 이뤄졌으면 했다. 주상절리대는 전망대와 탐방로가 마련돼 있어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도 비교적 편안하게 해안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본태박물관에 전시된 소반과 밥상 보자기(왼쪽 위), 장농(왼쪽 아래), 전통 의복과 베게, 장례식 때 사용했던 꼭두(왼쪽 두 번째부터) 등 우리나라 전통 작품들과 미디어아트, 무한거울방(오른쪽 위), 노란 호박(오른쪽 아래) 등 현대 미술품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김진성 기자 paperk@ 본태박물관에 전시된 소반과 밥상 보자기(왼쪽 위), 장농(왼쪽 아래), 전통 의복과 베게, 장례식 때 사용했던 꼭두(왼쪽 두 번째부터) 등 우리나라 전통 작품들과 미디어아트, 무한거울방(오른쪽 위), 노란 호박(오른쪽 아래) 등 현대 미술품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김진성 기자 paperk@

■‘본래의 모습’ 본태박물관에서 만나는 전통과 현대의 미학

제주도를 방문할 때마다 꼭 가야지 하면서도 인연이 없던 곳이 있었다. 본태박물관이다. 세계적인 건축가인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곳으로 건물 자체가 예술품으로 인정 받는 곳. 그토록 ‘애타게’ 바랬던 곳이 대포주상절리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망설임 없이 찾았다. 비마저 쏟아지니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2012년 개관한 본태박물관은 1995년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안도 다다오가 2009년 설계를 시작해 2012년에 완공했다. 이곳은 노출콘크리트에 빛과 물을 건축 요소로 끌어들여 건축과 주변과의 조화를 이뤄내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 철학이 담겨 있다.

매표소를 지나 제1전시관으로 가는 길에서 발길을 멈췄다. 노출된 콘크리트와 마주한 한국 전통의 기와담장, 마치 시대를 분할이라도 하는 듯한 직선미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물, 간간이 드리우는 햇빛까지…. 안도 다다오의 건축 철학을 한 곳에 모아 놓은 듯한 공간에 넋을 잃었다. 건축 설계 문외한인 기자에게도 설계자의 의도를 단번에 알 수 있도록 한 것. 역시 고수는 심플하다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설계자의 철학은 박물관 내부에서도 이어졌다. 박물관은 전통공예품과 현대 미술품 등 두 개의 전시 공간으로 이뤄져 있는데, 미술품의 전시와 공간 배치도 설계자의 철학이 반영된 듯 했다. 다소 미로같은 느낌도 없지는 않았으나, 이 또한 설계자의 의도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1관은 우리나라 전통 수공예품으로 채워졌다.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던 소반이나 밥상 보자기, 베개 등이 기하학적으로 전시돼 눈길을 끌었다. 특히 벽에 박혀 있는 것 처럼 전시된 형형색색의 베개들은 하나의 미술 작품이었다. 시간의 흔적, 한 시대의 삶과 모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2관은 백남준의 〈나는 비트겐슈타인을 읽지 않는다·1998〉와 안도 다다오의 〈명상의 방〉 등 현대미술이 전시된 곳이다. 어렵고 난해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대미술을 편안한 공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어 인상적이다.

3관은 다시 우리 전통의 방이다. 유교 제례 때 사용하는 향로를 비롯해 각종 제기와 영혼이 앉은 의자인 ‘교의’(交椅), 제사에 사용되던 다양한 그릇들을 그림과 한문으로 기록한 병풍인 ‘제기도병풍’ 등 다양한 소장품이 전시돼 있다. 제사를 지내는 터라 3관에 전시된 물품들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4관의 콘셉트는 ‘죽음’이다. 〈피안으로 가는 길의 동반자〉. 점차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 상례를 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죽어야만 타 볼 수 있는 상여의 모습이 꽤나 화려했고, 함께 가는 꼭두의 모습은 익살스럽고 친근했다. 상여와 꼭두를 보고 있으니 우리 선조들에게 죽음이란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의 여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피안(彼岸)으로 가는 것. 번뇌를 벗어나 깨달음과 평안에 이른 언덕. 이것이 죽음이다.

특히 올해 문을 연 특별기획관인 본스타전시관 또한 관람객들에게 인기다. 이곳도 안도 다다오의 설계로 완성됐는데, 박물관 건물이 노출 콘크리트를 통해 차분하고 사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면, 본스타전시관은 빛과 반사를 통한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건물 외관에 사용된 스테인리스 패널은 제주의 하늘과 구름, 빛을 부드럽게 비추고, 날씨와 시간에 따라 건물의 색과 분위기도 달라진다.

내부 전시도 인기다. 안도 다다오의 작품 전시에서부터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과 무한거울방 등이 설치돼 있다. 특히 쿠사마 야요이의 트레이드 마크인 물방울 패턴의 노란 호박은 이곳의 포토존이다. 끝없이 늘어나는 수많은 점들을 직접적이고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무한거울방에서는 점점 소멸되는 자신을 느끼며 몽환적인 느낌마저 들게 한다. 자아의 소멸이 곧 깨달음. 부처의 가르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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