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 촉발에 유권자 외면… 트럼프 국정 독주 심판 [美 중간선거]
경합지 7곳 중 최소 6곳 승리
공화당 현역 줄줄이 뒤집어
캔자스, 민주 상원 100년 만
이란전쟁 여파 고유가 직격탄
트럼프 시대 종말 인식 확산
3일(현지 시간) 미국 캔자스주 오버랜드 파크에서 민주당 애덤 해밀턴 후보 지지자들이 당선 소식에 환호하고 있다. 캔자스에서는 1932년 이후 100년 만에 민주당 상원의원이 당선됐다. AFP연합뉴스
미국 민주당이 연방 상·하원을 동시 탈환한 3일(현지 시간) 중간선거 결과는 공화당의 아성이던 지역들이 무너졌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이었던 이번 선거는 이란전쟁에 따른 유가 인상과 관세정책이 초래한 물가 상승 등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정책이 유권자들에게 외면 당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민주당은 이날 자정(동부시간 기준) 기준으로 텍사스, 캔자스,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공화당이 현역인 지역의 상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할 것으로 예측된다. 자정 기준 텍사스주는 69.3%의 개표율을 보인 가운데 민주당 제임스 탈라리코 후보가 58.8%를 득표, 공화당 켄 팩스턴 후보(39.6%)를 누르고 상원에 입성할 전망이다. 텍사스는 1988년 이후로 민주당 상원의원이 배출된 적이 없다.
캔자스주는 92.1%의 개표율 기준으로 민주당 애덤 해밀턴 후보가 51.5%를 얻어 공화당 현역 상원의원인 로저 마샬(45.5%)을 꺾을 것으로 예측됐다. 캔자스는 텍사스보다 더 공화당의 뿌리가 깊은 곳이다. 1932년 이후 거의 100년 만에 민주당 상원의원으로 애덤 해밀턴 후보가 당선될 전망이다. 미 정치권에선 캔자스가 선거 막판 ‘경합지’로 분류된 것조차 이변으로 여겨졌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남부의 보수적 색채가 짙은 ‘딥 사우스’로 불린다. 역시 2000년대 들어 민주당 상원의원을 배출한 적이 없으며, 직전 상원의원은 올해 돌연 사망한 린지 그레이엄(공화)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절친’이었다.
하원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은 바로미터로 여겨지는 켄터키 제6선거구를 비롯해 텍사스, 미시시피, 앨라배마, 캔자스, 네브래스카, 미주리 등지에서 곳곳에서 승리하며 다수당 지위를 확보했다.
이같은 ‘블루 쓰나미’는 갈수록 양극화하는 미 정치 지형에서 민주당이 보수 지지세가 강한 지역에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평가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민주당이 텍사스, 캔자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거둘 수십 년 만의 가장 좋은 선거 결과가 향후 정치 지형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전망했다.
민주당이 상·하원뿐 아니라 보수 성향 지역의 주정부와 주의회에서 공화당의 장악력에 균열을 가져오면서 ‘한 세대에 한 번 있을 법한 기회’를 잡았다고 NYT는 짚었다. 민주당 전직 상원 고위 보좌관인 애덤 젠틀슨은 민주당이 공화당 강세 주에서 주지사와 연방 상원의원을 동시에 배출하면 오랫동안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던 지역에서 당의 입지를 회복하고, 다음 선거를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이 참패한 가장 큰 원인은 물가로 지목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2월 말 개시한 이란전쟁이 유가 급등을 불러오면서 휘발윳값이 갤런당 4달러를 넘은 지 오래다. 미국에서는 갤러당 4달러를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본다. 땅이 넓어 자동차 이용이 필수인 미국 유권자들에게 갤런당 4달러를 넘어가는 휘발윳값은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다.
중간선거를 앞두고 경윳값이 1년 전에 비해 70%나 치솟고 이란전쟁으로 비료 수급도 불안정해지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층인 농업계와 운송업계에 큰 타격을 안겼다. 작물 수확용 장비는 대부분 경유를 사용한다. 각국과의 관세전쟁에 따른 제품가격 인상까지 더해지면서 미국인들의 생활비 부담이 커져 무당층과 민주당 지지자들은 물론 지지층 내 실망감과 분노를 초래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한 이민단속은 공화당 내 백인 핵심 지지층의 환호를 끌어냈으나 2024년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던 히스패닉 및 흑인 유권자들이 지지를 철회하는 계기가 됐다. 민주당은 이런 트럼프 행정부의 약점을 파고들어 ‘감당 가능한 생활비’에 의제를 집중시켰다. 트럼프 대통령과 주변의 부패 의혹도 적극 제기하며 무당층과 중도 보수를 공략, 대승을 끌어냈다.
민주당은 내년 1월 상·하원이 임기를 시작하는 대로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전방위적 조사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행정부 고위 인사는 물론 트럼프 일가 역시 조사 대상이 될 전망이다. 행정부와 백악관 고위 인사들을 상대로는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적인 정책 추진을 추궁하고 가족에 대해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게 된 경위를 파헤칠 것으로 전망된다.
민주당 내부적으로 아직 방침이 서지는 않았지만, 하원의 강성 진보 성향 의원들을 중심으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추진 요구도 거세질 가능성이 있다.
예상했던 것보다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 들게 된 공화당에서는 ‘트럼프 시대의 종말’이라는 인식이 확산할 수 있다. 사실상 ‘트럼프 원맨쇼’와 다름없이 치러진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낙점한 후보들이 줄줄이 고배를 마신 것은 미 유권자들, 특히 공화당 지지층 사이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다는 방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차기 대선을 앞두고 절치부심할 공화당은 지금까지처럼 ‘트럼프 브랜드’를 앞세울지, 아니면 민주당의 ‘안방 침투’에 맞서 다른 길을 모색할지를 놓고 한동안 격론이 벌어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