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의 지금이곳] 한국에서도 소도시 여행
논설위원
알고리즘이 알려준 은행나무·5일장
국민 크리에이터가 일상을 명소로
인구 감소만으로 실패 단정 못 해
소멸 대신 회복·부흥의 시선 필요
일본처럼 한국도 소도시 여행 가능
행정은 교통·숙박·코스 길 열어주길
요즘 알고리즘이 필자에게 가장 많이 띄워 주는 콘텐츠는 은행나무다. 우연히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콘텐츠를 클릭했다가 전국 은행나무들을 만나는 호사를 즐기고 있다. 워낙 알려진 은행나무도 있지만, 자주 찾는 곳인데 존재를 몰랐던 은행나무를 만났을 땐 마치 선물을 받은 기분마저 들었다.
청도 운문사 은행나무, 거창 의동마을 은행나무길, 의령 곽재우 장군 문화공원 은행나무, 울주 구량리 은행나무, 함안향교 은행나무, 밀양 금시당 은행나무, 경주 운곡서원 은행나무…. 부산에서 차로 한두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은행나무만도 한 손으로 다 꼽지 못할 정도다.
얼마 전까진 5일장에 빠져 있었다. 일정 없는 주말엔 검색창에 ‘5일장’을 입력해 장이 선 시장을 찾곤 했다. 창녕전통시장, 거창시장 같이 규모 있는 장엔 상품과 흥정 구경하는 맛이 있고, 군북시장 자인시장 등 작은 장은 맛집이나 명소와 묶어 다니면 좋았다. 그러다 울주 남창옹기종기시장도 만났다. 주말에 장이 들면 동해선을 타고 건너가 남창 골목을 어슬렁거리다,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이다 장에 들러 소머리국밥에 소주 한 잔 곁들이는, 나만의 ‘반나절 여행지’가 됐다.
곰곰이 생각하면 지방이 품은 매력을 먼저 발견한 누군가가 SNS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덕을 제대로 보고 있는 셈이다. 사실 온 국민이 크리에이터인 시대다. SNS에선 때가 되면 꽃 개화 시기, 단풍 진행 상황을 알려 주고, 혹시 아쉬울까 주변 맛집, 카페까지 짚어 준다. 하나를 클릭하면 연관 콘텐츠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그걸 본 외지인들이 찾아가 또다시 콘텐츠를 만들어 올리며 인기를 더한다. 바이럴(온라인 입소문)을 제대로 타면 소멸 위기를 걱정하던 곳이 한순간 핫플로 떠오른다.
온 나라에 아직 조명되지 못한 장소와 이야기가 넘친다. 콘텐츠의 보고인 셈이다. 최근엔 지역에서 생산된 로컬 콘텐츠들이 더해지고 있다. 애써 키운 농작물을 소개하는 청년 농부, 숙박업소를 차린 귀촌인, 지역 농산물로 만든 빵과 디저트를 파는 카페 주인이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마을 이야기를 부지런히 올리고 있다. 필자도 여행지 정보를 검색할 때 키워드 ‘현지인’을 빼놓지 않고, 로컬 크리에이터가 생산한 콘텐츠인지 다시 확인한다.
무심코 지나치던 일상 공간에 새로운 시선을 더해 특별한 공간으로 만드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전북 군산 구도심을 되살리는 작업을 하는 도시재생 그룹 ‘주식회사 지방’, 빈집과 폐건물을 로컬 숙소로 탈바꿈시킨 ‘리플레이스’ 같이 상당한 성과를 낸 크리에이터도 적지 않다. 이들의 활약은 우리 소도시들이 여전히 독창적인 이야기와 가능성을 품고 있음을 증명한다.
물론 지역소멸은 여전히 엄중한 국가적 위기다. 청년 부재, 빈집 증가, 의료 교통 인프라 부족 등 불편한 것투성이다. 하지만 인구수나 경제 지표 등만 따진 탓에 패배주의적 시선에 갇힌 것도 사실이다. 지자체마다 특색 있는 축제를 내놓고, 대형 개발도 진행하는 등 노력도 펼쳤다. 필요한 일들이지만 여전히 성과를 체감하기 어렵다.
지역소멸 문제는 용어부터 고칠 필요가 있다. 인구소멸 용어만 해도 그 이면에 숨은 무기력, 자존감 하락을 걷어내야 한다. 인구가 줄면 실패한 도시고, 인구가 늘었다고 성공한 도시는 아니지 않나. 지역 골목과 마을엔 여전히 남은 사람이 있고, 그들이 지키는 일상과 가치가 있다. 소멸을 풀 해답은 찾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 결과가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지역 회복’ ‘지역 부흥’처럼 용어부터 긍정적으로 바꿔 보는 건 어떤가.
개인적으로 한국 소도시들이 아시아, 나아가 세계인이 찾고 싶은 여행지가 되는 날을 꿈꾼다. 몇 차례 다녀본 일본 소도시 여행은 처음엔 맛집이나 쇼핑에 이끌렸지만 여행 후에 오래 남는 기억은 특별한 것들만은 아니었다. 아소산을 보러 갔지만 가는 길 국도 휴게소에서 먹은 도시락 맛이 그립고, 구마모토 한 마을은 지명보다 자전거 타고 가던 야구복 차림 학생이 건넨 인삿말로 기억되는, 그런 식이다.
수많은 국민 크리에이터들은 진작부터 유적과 자연, 특산물 같은 풍부한 자산을 가진 한국 소도시들에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입혀 왔다. 화려한 축제나 개발처럼 단번에 상황을 바꿀 순 없지만, 조금씩 지역 고유의 색깔을 선명하게 만드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쌓아 온 지역의 매력과 가치들을 생각하면 머지 않아 외지인들이 줄서서 한국 소도시를 찾는 상상을 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행정의 도움이 더해지면 시기를 더 당길 수 있을 것이다. 대중교통, 숙박시설, 명소와 명소를 잇는 코스 개발 등 민간이 하기 어려운 영역들이 있다. 지자체들의 관심과 분발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