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현실을 그리지 않아도 현실을 말할 수 있는가-피터 브래들리와 흑인 추상미술
미술평론가·철학박사
피터 브래들리, 5도권(1973). © Peter Bradley, 작가 및 카르마(Karma) 제공
예술가는 반드시 고통스러운 현실을 그려야 하는가? 11월 5일 뉴욕 모마 피에스원(MoMA PS1)에서 개막하는 ‘하드 아트’(Hard Art)는 1969년 프랭크 볼링의 ‘5+1’과 1971년 피터 브래들리가 기획한 ‘디럭스 쇼’(The DeLuxe Show)로 거슬러 올라가, 미국 흑인 작가들이 추상을 어떻게 자신들의 언어로 만들어왔는지를 다시 살피는 전시다.
브래들리의 1973년작 ‘5도권’(Circle of Fifths)을 보자. 가로 3m의 대형 화면에서 검정, 갈색, 녹색, 분홍, 파란색이 서로 밀고 들어가고 번져간다. 음악에서 완전5도의 관계를 따라 음들이 순환하듯이, 색들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독자적인 리듬을 만들어낸다.
추상미술의 중요한 변화는 색과 선, 형태가 캔버스 바깥의 대상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화면을 구성하는 힘을 갖게 된 데 있다. 그린버그는 모더니즘 회화가 평면과 색채라는 회화 고유의 조건을 탐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추상은 단순히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 데 그치지 않는다. 색과 형태가 스스로 조형적 질서를 만들어가는 미술이다.
브래들리의 화면에서도 중요한 것은 색들 사이의 관계다. 그러나 이러한 자율성은 현실과의 단절을 뜻하지 않는다. 아도르노에게 예술은 사회로부터 독립된 형식을 추구하면서 그 사회의 모순을 내부에 품고 있는 존재였다. 현실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형식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을 낯설게 만든다.
브래들리의 추상은 여기서 또 다른 의미를 얻는다. 당시 흑인 작가에게는 인종차별과 투쟁을 재현해야 한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브래들리는 자신의 정체성이 작품의 형식까지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에게 추상은 현실을 외면하는 도피라기보다, 자신의 정체성에 부과된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실험이었다.
이 지점에서 브래들리의 추상은 한국의 민중미술과 흥미로운 긴장을 만든다. 1980년대 민중미술은 당시 제도권 미술의 추상과 모노크롬이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노동과 역사, 국가폭력 같은 구체적인 현실을 화면으로 불러들였다. 물론 한국의 추상과 실험미술 역시 기성 미술제도와 조형질서에 맞선 또 다른 전위였다. 다만 민중미술은 그러한 형식적 저항만으로는 당대의 정치적 현실에 대응할 수 없다고 보았다.
민중미술이 “왜 현실을 그리지 않는가”라고 물었다면, 브래들리의 추상은 오히려 “왜 흑인 작가는 반드시 자신의 현실을 그려야 하는가”라고 묻는 셈이다. 민중미술이 사회적 현실을 다시 미술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면, 브래들리는 현실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하라는 요구 또한 예술가를 구속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때로는 현실을 직접 그리는 것이 저항이고, 때로는 현실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그리지 않는 것이 저항이 된다.